우리들은 순교자성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은 순교로써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고 증언하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함께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신부님처럼 신앙 때문에 죽을 수 없습니다. 제 신앙이 멀었나 봅니다.” 어느 청년이 저에게 했던 말입니다. 이 말을 듣고 그냥 웃음을 지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 청년은 제가 신부이기 때문에 순교할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겠지요.
‘나는 과연 순교할 수 있을까?’라는 성찰, 또는 ‘순교할 수 있으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아본 경험이 있으신지요.
나와 특별한 관계가 아닌 사람이 죽는다면 뒤따라 죽지 않습니다. 각자의 삶에 귀하고 소중하고 또는 사랑하는 존재가 죽을 때 가능한 자발적 행위가 바로 순교입니다. 따라서 ‘순교하다’란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삶에 있어서 소중하고 귀하기에 그리고 그분을 사랑하기에 목숨을 바쳐 뒤따라 죽을 수 있음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순교할 수 있느냐’라는 다소 피상적인 질문보다 ‘나는 과연 평소에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 ‘나의 삶에 있어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평소에 나의 신앙을 얼마나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고 살아가고 있는가’
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하는 것이 신앙을 성찰하는데 유익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기억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은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하셨기에, 그들에게 있어 신앙은 목숨을 내어놓을만큼 귀하고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순교란 결국 평소에 내가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느냐, 평소에 신앙을 얼마나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가와 직결되는 것입니다.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평소 신앙생활의 결과가 순교입니다. 질문으로 글을 마치겠습니다.
순교할 수 있겠습니까?
군위군청소년수련원 원장 박동찬(미카엘)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