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쯤, 자고 일어나니 왼쪽 발목이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갔습니다. 붓기는 없었는데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겠고, 양말도 못 신을 정도로 아팠습니다.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의사가 와서 보더니 정말 큰소리로,“통풍이네, 통풍! 신부님! 매일 술 먹죠? 신부님들은 술 좋아하시니까! 이거 고기 많이 먹고 술 많이 마셔서 그래요!”라고 말합니다. 주위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저와 의사를 바라봅니다. 엄청 민망하고 부끄럽고, 무엇보다 불쾌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절 저는 일이 너무 많아서 주 7일 근무를 하며 ‘제발 좀 쉬고 싶다.’라는 혼잣말을 입에 달고 지냈기 때문입니다. 회식이나 모임은 둘째치고, 간단한 식사 자리조차 갖지 못했던 때였습니다. 어떤 연유가 있는지, 최근 무슨 이유로 통풍이 생겼는지, 상황에 대해 질문하거나 제 말을 들을 생각은 아예 없더군요.
‘확증편향(確證偏向, confirmation bias)’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건, 상황에 대한 객관적 접근과 해석보다는 자기 경험이나 생각을 토대로 하여 왜곡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거나 자기 입장에서만 받아들여 그렇게 확신해 버리는 사고의 편향을 말합니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이런 편향의 이유는 선입견 때문입니다. 자기 경험의 축적인 선입견이 고착되면 고집이 되고, 고집으로 인해 불통(不通)이 생깁니다. 그러다 보면 어리석은 판단, 지혜롭지 못한 관점,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성숙한 이들 가운데에서는 우리도 지혜를 말합니다.”(1코린 2,6) 지혜를 말해도 안 듣습니다. 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니 말을 나누는 소통의 장마저 차단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그런 상황에 처합니다. 율법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그들을 통해 세상에 당신의 사랑을 알려주시기 위한 표징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과 의미는 희석되고 형식과 틀, 체면과 익숙함, 편안함과 안정감. ‘하던 대로 하면 된다.’는 식의 타성에 빠져버린 사람들에게는 예수님 사랑의 새 계명이 전혀 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폐지가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오셨음에도 사람들은 심지어 제자들마저도 본질을 안 보고 있습니다. 못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강하게 말씀 하십니다. ‘살인’이라는 자의(字義)에만 얽매일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도 해쳐서는 안 된다. 매 미사에 참례하고 고해성사를 열심히 받기 전에 성체께 합당한 마음을 가져야 하며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원망을 품게 했다면 화해해야 한다. “너희는 말할 때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
우리가 최우선적으로 끊임없이 조심하고 애쓰고 노력해야 하는 것은 죄를 짓지 않고 악을 피하는 것보다, 어쩌면 ‘나’ 속 깊은 곳에 잔뜩 똬리를 틀고 있는 신념이라고 착각하는 고집, 사랑 없는 믿음, 목적 없는 소망으로 딴딴해진 편향과 고집불통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교구 소람상담소장 | 김종섭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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