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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삶을 위한 표지와 기억

 

제 오른손등에는 화상으로 인한 제법 큰 흉터가 있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아침에 일어나 밥도 먹기 전에 집 밖 공터에 가서 불장난을 하다가 입은 화상 자국입니다. 부모님께 꾸중들을 것이 무서워 말씀드리지 않고 몰래 밥도 왼손으로 먹고 학교에 갔었습니다. 처음부터 말씀드리고 치료를 받았더라면 지금처럼 흉터가 남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흉터 덕분에 그 후로는 불장난을 하지 않았고, 혹시 불을 만지더라도 늘 조심했던 것 같습니다. 아픔이기는 하지만 그 화상이라는 표지와 함께 각인된 기억은 제 삶이 불이라는 위험으로부터 조심스럽게 살아갈 수 있도록 방향을 지워줍니다.


오늘은 사순 제1주일입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 타락한 인류에게 홍수라는 사건을 통해 새로운 시작을 선물해 주심을 전해줍니다. 세례성사 안에서 물로 씻겨짐으로써 새로운 정체성, 하느님의 아들 · 딸이라는 새로운 존재로서의 삶을 시작하듯이, 하느님께서 손수 만드신 인류가 홍수 이후 새로운 삶을 시작하도록 그 표지로 노아에게 무지개를 드러내 보이십니다. 인류가 그 무지개라는 표지를 볼 때마다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사랑의 약속은 아브라함을 통해 선택하신 이스라엘 민족에게 계속되었지만, 그들의 나약함은 끊임없이 그 사랑의 표지를 외면하고 맙니다.


그래서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를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전에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할 수 있는 사건을 경험합니다. 바로 광야에서의 체험입니다. 공생활 시작하기 전 40일간의 광야생활, 그리고 그 안에서 경험한 사탄의 유혹은 단순한 고통과 극기의 순간이 아니라 그 고통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사랑의 동행을 체험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고 선포하시는 회개로의 초대는 바로 이러한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향한 초대인 것입니다. 회개라는 것이 단순히 죄를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삶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하는, 그리고 그 정향의 원동력이 바로 하느님 사랑의 체험이라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족함으로 인한 죄와 잘못은 우리에게 상처를 남깁니다. 그러나 그 상처가 헤어날 수 없는 웅덩이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의 표지로 받아들여질 때 우리의 삶은 제 방향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순 시기를 시작하며 바라보는 우리의 부족함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사랑의 표지입니다. 잊지 않고 다시 하느님께로 삶의 방향을 돌리도록, 그리고 그 이유는 우리의 부족함보다 더 큰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기억하도록 주신 선물입니다.

 

교구 청소년국 차장 석상희 요셉 신부

2018년 2월 18일 사순 제1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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