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모처럼 교외로 나들이를 갔습니다. 동기신부님 두 분이 하루 휴가까지 내어서 저를 자가용에 태워서는 한 시간여를 달려 어느 곳에 갔습니다. 모처럼 바람을 쐬니 좋더군요. 같이 점심을 먹고 다시 커피 한 잔을 하려는데, 좀 많이 시골이었기에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네비게이션 검색을 통해 목표지점을 선택하고 갔습니다. 산골 입구의 조그마한 마을, 사오십 년은 된 듯한 집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더니 차량 한 대가 겨우 지날만큼 아주 좁은 비탈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니 번듯하고 전망도 좋은 카페가 등장하더군요.
어찌 보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불과 십 수년 전만 해도 이런 곳을 찾아오기도 힘들뿐더러 찾아오기까지 애를 먹고 길을 헤매는 경우가 허다했음을 떠올려보니, 평소에 느끼지 못하는 생활상의 변화가 얼마나 큰지를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네비게이션 사용이나 도로표지판 읽기가 익숙하지 못한 사람은 여전히 이런 구석진 곳을 찾는 데에 애를 먹을 수도 있겠지요. 저도 운전을 안 한 지가 몇 년 되어가다보니, 정말 친구신부님이 아니었더라면 오지 못할 곳을 와 보게 된 것에 더 감사하는 마음으로 차 한 잔을 마셨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정녕 내 백성이 두 가지 악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생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제 자신을 위해 저수 동굴을,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예레 2,13)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은 번지수를 잘못 짚은 듯한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생수의 원천인 하느님을 향해야 하는데, 물이 고일 수 없는 저수 동굴을 팠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잘못된 번지수일까요? 네비게이션이나 표지판을 보고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아쉬움은 어떤 실수와 착오에서 비롯될까요? 게으름이나 자신감이 부족하다고 지레 포기하는 열등의식, 남들 정도만 하면 된다는 안일함과 자기합리화, 타인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자신의 부족함이나 준비되어 있지 않음을 느끼거나 드러낼까봐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폐쇄적 태도 등이 있을 것입니다.
그 반면에 우리가 마셔야 할 생수, 생명수는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는 까닭을 두고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마태 13,11)고 하십니다. 차별하거나 평가하시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나마 믿음이 있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 사이에 생겨나는 격차를 감안하여 따로 말씀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이 없어서 알아들을 가능성조차 희박한 이들에게 그들이 짐작하기 좀 더 쉬운, 그러나 온전히 알아듣기에는 좀 더 부족할 수 있는 방법으로라도 하느님 나라의 구원을 받아들이도록 해주고 싶으셨던 것이죠.
우리가 성경을 읽고, 레지오 교본을 읽고, 기도문을 외면서도 쳇바퀴 돌 듯 ‘잘 믿거나 이해하지 못한 말씀과 내용을 더 잘 알아들으려 노력하지 않는’ 완고한 마음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애써 샘물을 얻고자 땅을 파지만, 수고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더해주지 못하는 결과 혹은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불신만을 얻는 사람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믿음으로써 행한다는 것의 중요성을 잘 음미해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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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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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