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김대건 신부님은 한국인 최초의 가톨릭 사제로서 특별한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신부님은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사실 이 가문은 조부(祖父) 때부터 천주교를 믿었고 박해를 받아 몰락해 버렸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이 태어나신 곳으로 순례지가 되어 있는 충청도의 '솔뫼 성지'도 사실은 신부님의 부모들이 박해의 손길을 피해 다니며 안정되지 않은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정착한 곳이었습니다.
김 신부님은 13살이 되던 1833년에 세례를 받습니다. 당시에는 박해가 극심했기 때문에,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곧 주님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는 순교를 각오한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1836년에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은 현지인 사제의 양성을 목표로 세 명의 소년을 선발하여 당시 파리외방전교회의 극동아시아 본부가 있던 마카오로 유학을 보내는데, 이때에 김 신부님도 선발됩니다. 15살의 어린 소년이 정든 부모님과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서 공부해야하는 고충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김대건 신학생은 전쟁 때문에 필리핀으로, 또 말레이시아 페낭으로 피난길에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이렇게 어린 소년이 유학길에 오르는 것은 김대건 안드레아 본인에게도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지만, 이것은 부모의 입장에서도 대단한 결심이었습니다. 국가의 허락 없이는 국경을 넘는 것이 국법으로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던 시절이니까요.
신부님이 유학 중이던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신부님의 부친(성 김제준 이냐시오)은 순교하였고, 어머니는 이웃 신자 가정을 찾아다니면서 문전걸식을 하여 살아갔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신앙 때문에 이 가문은 벼슬과 재산을 잃었으며 부모와 친지를 잃었던 것입니다.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상황에서 볼 때, 김 신부님의 가정은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기념하고 있는 김대건 신부님을 특별히 공경하고, 그분을 위대한 분으로 우러러 보는 까닭은 단지 '최초의 한국인 사제'라는 상징성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김 신부님이 민족의 구원을 위해 그리고 한국교회와 신자들을 위해 죽음까지 무릅쓰고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열망을 위해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갖은 아픔을 어린 나이에도 견뎌내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신부님이 교우들을 사랑하셨고, 조국과 교회 공동체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순수한 열정을 지니고 계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신부님의 이러한 불타는 사랑과 열정을 본받고자 특별히 신부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부님의 숭고한 사랑과 불타는 열정은 어느 순간에 갑자기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으로부터 자연스레 보고 들으면서 익힌 것이며, 무수한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서 얻어진 값진 열매입니다. 박해로부터 오는 현실적인 삶의 어려움과 떠돌이 생활의 고통,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신앙을 지켜나가는 부모님의 삶은 신부님이 힘들고 어려웠던 유학시절을 잘 참고 보냈던 것이나 목숨을 걸고 신자들을 보살피려는 노력을 보여줄 수 있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신앙을 지키는 것과 더불어 누군가에게 이러한 신앙의 본보기가 되어줄 몫 또한 나누어 받았습니다. 특히 하느님의 신비를 스스로 알아듣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어린이와 젊은이들의 신앙을 위해 우리가 신앙을 물려줄 책임을 다하기가 쉽지 않음도 느낍니다. 그러기에 이 과정에서, 김대건 신부님이 순교하기까지 그분을 인도하신 성령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함을 인정하고 또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놀라운 믿음과 열성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신 김대건 신부님께 전구를 청하며, 신앙을 물려주는 데에 필요한 은총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하는 하루를 보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