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부분의 교구에는 사회적 돌봄 시스템에 발맞추어 이루어지는 사목활동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교정(矯正)’사목인데요, 교도소의 재소자들을 돌보고 출소 이후의 자활(自活)을 돕는 것이 주된 소임입니다. 예전에 우리 교구의 교정사목을 담당하시는 신부님들께 종종 들을 수 있는 부류의 우스갯소리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
어느 교우분과 자연스레 식사를 하거나 자리가 만들어졌을 때, 교우분이 물으십니다 : “신부님은 어디 계십니까?”
신부님은 대답하죠 : “네, 저는 교도소에 있습니다.”
이럴 때에 살짝 정적(靜寂)이 흐르고, 난감한 기류가 스쳐지나갑니다. 그러고 나서는 다른 화제(話題)로 대화가 옮아가는데, 나중에 이 어색함은 교도소에 있다는 신부가 죄를 지어 재소자(在所者)로 있다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교도소’라는 곳의 이미지가 ‘재소자들이 수감(收監)되는 곳’이라는 선입견에서 비롯된 해프닝인 것이죠.
비단 이 경우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은연중에 가지는 선입견 혹은 고정관념이 불러일으키는 ‘불편함’과 ‘진실의 왜곡’을 떠올려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편치 않음’이 ‘이해와 용서’라는 대목에서 큰 걸림돌로 작용하는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서운하거나 불만이 있을 때에 ‘용서가 안 된다’는 표현까지 씁니다. 믿는 사람들은 이런 표현을 나름 종교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이런 사람은 주님께서도 용서하시지 않을 것이다.”
어떻습니까? 십계명의 첫째, 둘째 계명을 명백히 어기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자신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음을 심지어 하느님을 빌어서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나 여러 강론, 묵상 등을 통해 배우는 하느님의 모습은 ‘자비로우신 주님’입니다. ‘용서하시는 성령을 거부하는’ 죄 외에는 모두 용서해주실 분이 바로 하느님이심을 우리는 믿고 또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정작 현실에서는 그런 하느님을 잊어버리거나 믿지 않는 듯한 모습을 위의 경우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천벌(天罰)을 받았다고 모두가 인식하는 중풍병자를 두고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순간 율법 학자들은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이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비판합니다. 하느님의 사죄(赦罪)가 아니고서는 고통을 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사죄행위에 대해 인정하지 못하는 ‘좁은 식견’이 드러납니다.
여기서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됩니다 : “나는 이런 좁은 식견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바라보지 않았던가? 그래서 이해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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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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