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와 복음은 한결같이 “부르심과 따름”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먼저, 오늘의 제1독서에서 엘리야는 엘리사를 부릅니다. 엘리야의 부름을 받은 엘리사는 가진 것을 모두 버려두고 엘리야에게 뛰어갑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엘리야를 보자마자 대뜸 부모에게 작별인사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합니다. 복음에서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대조적인 듯 보입니다만, 엘리사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집으로 돌아온 엘리사는 기르던 겨릿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자신이 쓰던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운 다음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 합니다. 여기서 엘리사의 작별인사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남은 것을 정리함으로써 모든 것을 제대로 버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좀 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엘리사는 제대로 정리할 시간이라도 받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럴 여유조차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따르라고 하시면 모든 것을 버려두고 즉시 따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제자들 앞에는 엘리야가 아니라 예수님이 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아닌 예수님께서 계시다는 말은 심판의 때가 다가왔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 초대교회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곧 ‘구원의 완성’으로서의 마지막 때를 목전에 두고 살아가는 삶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더 이상의 시간적 여유가 허락되지 않는다 여겼습니다.
종말이 앞에 놓여 있다고 여기는 사람의 삶은 보통의 삶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느님 나라만 생각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삶이 이러해야 한다고 분명히 밝히십니다.
오늘 제2독서의 갈라티아서 말씀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종말론적 삶을 두고 자유로운 삶, 해방된 삶이라고 부릅니다. 육의 욕망에서 벗어나고 죄의 지배에서 벗어난 삶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자유로운 삶으로 부르심 받은 이들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받는 유혹이 힘겹다 느끼는 때에는 간혹 세상과 떨어져 혼자 살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을 듯한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죄는 관계 안에서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특히, 본의 아니게 주변 사람들과 엮임으로써 반복적으로 짓는 죄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 큰 부담이며 멍에입니다. 이 때문인지 교회의 전통은 성직자나 수도자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가족마저도 끊어버리는 십자가를 요구합니다. 엘리사가 그러했듯, 그만한 노력을 기울여야 진정 자유로운 삶, 해방된 종말론적 삶을 살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버리는’ 정신은 비단 특정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 종말론적 신앙을 지니고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비록 우리가 현실 속에서 살아가야 하기에 세상과의 연관성을 무작정 거부할 수는 없다고 하지만, 적어도 세상이 우리에게 부추기는 욕망과 유혹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노력 또한 포기할 수 없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은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로 인해 죄에서 자유롭게 되고 해방된 이들'(갈라 5,1)이라는 신원의식을 일깨워주며 이 의식에서 힘을 얻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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