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 나오는 다음의 말씀, 곧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17) 는 증언은 ‘복음서 중의 복음’이라고도 불리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이 ‘복음(福音)’, 곧 기쁜 소식은 어떤 응답을 요구합니까?
하느님께서 외아들을 보내시어 인류구원을 이루시고자 하신 것은 그분의 ‘사랑’ 때문임을 믿으면 그 사실 자체로 심판받지 않고 구원받습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으면 그 자체로 심판을 받습니다 :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3,18)
당장 내가 아쉽지 않거나 성가시게 여겨서 누군가의 사랑과 호의를 거절하거나 무시했던 경험을 떠올려 봅니다. 적어도 철없던 시절에 부모님을 대했던 기억 정도는 떠오릅니다. 그때는 그 사랑을 거부하고 되레 그 사랑을 간섭이나 속박으로 여길 때도 있었고, 그 호의를 거절했다고 하여 큰 문제가 생기지도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 때 그 사랑을 제 발로 걷어찬 것은 제 복이며, 그 사랑을 더 충분히 받고 누리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면 이미 스스로에 대한 심판 혹은 징벌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 끝날에 있을 심판과 종말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구원받지 못하는 이들의 지경이라고 말하는 지옥(地獄)은 ‘성령을 모독하고 거부한’ 자들, ‘하느님의 사랑 자체를 믿지 않고 거부한’ 자들이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영원히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한 그 자체로 받는 징벌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일상 가운데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알아듣지 못하는 그 자체로 신앙생활이나 신앙인의 계명, 나와 신앙으로 인해 얽힌 모든 것이 내게는 굴레가 되거나 징벌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심판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있는 그 자체가 이미 심판을 받고 있는 것이며, 심판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고 보여지는 것들을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알려주시는 것으로 믿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는 구원에 가까워진 자, 이미 구원받은 자임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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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