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년기(壯年期) 이후에 새로운 운동을 배우거나 시작해보신 경험이 있습니까? 골프나 테니스 같은 스포츠 같은 경우, 열심히 노력해서 잘 해보고 싶은데 맘처럼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나 봅니다. 그래서 과외교습도 받아보고, 자세나 기본기 혹은 고급기술까지 교정을 받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마음같이 되지 않을 때에 코치에게 묻습니다 : “어떻게 하면 저도 xxx 선수처럼 할 수 있나요?”
그러면 흔히 듣는 대답이 이렇다 하죠 : “지금은 안 됩니다.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아마도 어릴 때부터 자연스레 길러진 습관과 운동에 맞게끔 길러진 신체가 동반되어야 하는 만큼, 근본적으로 사람의 몸이 완벽하게 뒷받침되기에는 한계가 명확하다는 뜻이겠죠. 그만큼 ‘환골탈태(換骨奪胎)’한다는 만큼의 변화는 그저 노력만으로는 이루기 어려운가 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3,7)는 말씀을 하십니다. 지난날의 나, 지금의 나와는 달리 근본적으로 하느님을 닮은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은 자신의 막연한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변화가 있어야 비로소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새로운 변화, 근본적인 변화에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기 위해 시도하는 많은 노력의 과정을 살펴보면, ‘(말씀이나 계명을) 들음 - 기억 및 이해 - (실천) - 믿음’의 단계를 거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 이해하지 못하면 믿지도 못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신비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때로는 ‘들음 - 믿음 - (실천) - 이해(깨달음)’의 과정으로 신앙의 신조(信條)를 수용하는 사람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니코데모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이해력이나 통찰력을 초월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먼저 믿음이 요구되는데, 그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차후에 예수님을 믿게 된 이후, 바리사이이면서 유대인들의 최고의회 의원이었던 니코데모는 예수님을 옹호할 뿐 아니라(요한 7,51)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는 데에 일조하는(요한 19,39) 등 예수님을 뒤따르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이는 믿음으로써만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기에 가능한 변화일 것입니다.
우리도 위로부터 태어나야 합니다. 이는 곧 믿음을 통한 새로운 변화입니다. ‘조건부’가 아니라 ‘온전한 신뢰’ 속에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을 지니기 위해 더욱 분발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