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의 터전인 중국 혹은 북경이 외국이다보니, 가끔 듣거나 느끼는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누군가가 어떤 대상을 두고 평소 가지고 있던 ‘이미지’라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의미의 ‘선입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대상(對象)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막연하게나마 가지고 있던 느낌이나 견해가 있었는데 가까이서 겪어보다보니 그 이미지가 달라지기도 하고, 그 다른 이미지가 지금의 관계형성이나 신앙생활에 도움 혹은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본당신부님이라고 하면 항상 연세 지긋하신 분으로만 생각해왔는데, 막상 여기서 제가 본당신부라고 소개를 하면 ‘생각보다 젊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본당신부님’에 대한 이미지가 조금은 달라지는 것이겠죠. 혹은 제가 경상도 대구 출신이라고 하면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 같지 않은 것 같다고 하시는 분들도 간혹 계신데, 이것 또한 기존에 가지고 있던 느낌을 바꾸어놓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 모든 신앙인은 저마다 하느님에 관한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을 바라보는 방식이나 관심사의 종류가 우리의 영성(靈性)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을 바라보는지에 따라, 주로 기도하는 지향이나 동기를 비롯하여 삶 속의 고통이나 죄악에 대한 이해의 지평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명확히 제시하십니다. 무려 여덟 번에 걸쳐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십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요한 5,22)고 말씀하시면서 하느님에 대해 우리가 갖기 쉬운 생각, 곧 구약성경에서 자주 등장하거나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흔히 가지고 있던 것과 같은 하느님의 이미지를 새롭게 변화시켜주십니다.
정녕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심판하는 권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심판은 우리를 단죄하거나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로부터 들은 대로 심판하시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하시는 모양 그대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요한 5,30)
그렇다면 우리는 노예가 주인을 두려워하듯 그렇게 하느님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로마 8,15 참조)
그러므로 정작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사랑이신 아버지를 외면하고 멀리하려는 우리 자신의 완고함입니다. 우리가 돌아보고 변화를 주어야 할 자신의 어떤 모습 가운데, 스스로 만들어놓은 이미지에 하느님을 가두어놓고서는 그 이상의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완고함을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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