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포크리테스’. ‘위선자’로 번역된 이 말마디는 ‘해석하는 자’, ‘설명하는 자’라는 뜻을 지니는데, 고대 사회에서 ‘연기자’를 가리킨 말마디였습니다. 제 본디 모습이 아닌 다른 이의 모습으로 분하여 무대에 올라 청중을 대해서 그럴까요. 복음서들은 ‘휘포크리테스’를 다른 형제들에게 배타적이고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완고한 이들, 특별히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비판할 때 자주 사용하곤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휘포크리테스가 등장합니다. 제 눈에 들보가 있어 앞을 제대로 못 보는 눈먼 이에 비유되는 휘포크리테스는 제 시각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굳이 형제의 눈에 든 티를 꺼내겠다는 오지랖마저 서슴지 않습니다. ‘티’로 번역된 ‘카르포스’는 지푸라기와 먼지 가루 혹은 작은 점과 같은 부스러기를 가리키는 말로, 기둥으로 쓰이는 나무라는 뜻의 ‘도코스(δοκός, 들보)’와 대비되어 나무의 작은 조각 정도로 이해됩니다. 타인의 작은 허물도 이 세상을 허물어뜨릴 만큼의 대단한 위험이나 위기로 해석하고 선동하는 경우가 휘포크리테스에겐 잦다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보이는 것을 제대로 보는 데 둔감합니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듣는 게 인간이지요. 제 눈에 들보가 있더라도 다른 이의 티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만남과 그 만남의 가치들이 학습되고 규정되고… 그리고 다른 만남의 잣대로 해석되겠지요. 타인의 티가 아무리 작더라도 그것이 때론 크게 보여 마음에 생채기로 남기도 하고, 타인의 티가 들보처럼 크게 보이더라도 우리 삶의 자세와 마음가짐에 따라 그 작디작은 티가 크디큰 사랑의 기회이자 버팀목이 될 때가 있습니다.
휘포크리테스는 상대적인 것들 안에서 저 혼자의 절대성을 강변합니다. 제 해석만이, 제 설명만이 가능하고 가능해야만 한다는 완고함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다릅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루카 6, 40) ‘배우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카타르티조’는 상호적 교육을 가리키기도 하고(갈라 6, 1)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서로의 친교와 일치를 가리키는 동사이기도 합니다(1코린 1, 10; 1테살 3, 10 참조). 한낱 인간의 모습으로 온 신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은 절대적인 천상의 가치를 상대적인 지상 안에서 이리저리 펼치는 유연성을 제 인식과 사고의 밑바탕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위해 자유로이 설 수 있는 ‘카타르티조’의 삶은 (1베드 5, 10 참조) 결국 용서와 사랑의 삶을 서로에게 가르치고 배우는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못 봅니다. 그래서 제대로 보고 제대로 듣고자 매일 반성하고 참회한다지만, 그걸로 충분치 않습니다. 아니, 그것으로 제대로 보기는커녕 여전히 우리의 들보는 제 눈과 제 마음과 제 머리에 틀어박혀 꼼짝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들보를 빼내기보다, 우리가 서로의 티를 너그럽게 볼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건 어떨까 합니다. 우리가 내뱉을 수 있는 유일한, 그래서 너무나 간절한 말 한마디는 ‘키리에, 엘레이손, 크리스테 엘레이손(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가 아닐까 합니다. 오늘 복음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며, 행여 제 들보에 힘들었던 이들, 그들 안에 계시는 주님께 다시금 겸허히 청합니다. 부디 용서하시고, 감히 사랑으로 봐 주십사 라고 나지막이 읊조립니다.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ㅣ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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