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바오로 사도께서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사건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본래 '사울'이라는 유대식 이름을 지녔던 사도는 개종함으로써 이름도 그리스식인 ‘바울로(혹은 바오로, Paulus)'로 바꿉니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다른 사람,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자의식의 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파스카 사건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그때부터 이미 예수님을 믿고 따랐던 사람을 꼽아보면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며, 바꿔 말하자면, 예수님을 믿어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 바오로 사도만 개종사건을 축일로 기념할까요? 한 사람이 개종한 사건이 무에 그리 중요하고 특별해서 이렇게 축일을 지낼까요?
다음의 두 가지 이유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바오로가 남긴 족적이 위대했다는 점입니다. 당시로부터 이천 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리스도교에는 교리적으로나 종교적 전통 안에 바오로의 흔적이 너무나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은 많이 볼 수 없기도 하지만) 자매님들께서 미사때에 머리에 수건을 쓰는 관습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래된 교회의 전통 가운데 하나로서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1고린 11장)에 나오는 바오로 사도의 말에 근거하여 형성된 관습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관습에서 비롯된 것을 바오로 사도의 해석을 덧대어서 그리스도교적 관습으로 정착되고 오늘날까지도 보존되어 오는 것입니다.
둘째, 바오로는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살아움직이는 증거였습니다. 그가 오늘 독서의 말씀에서 자신의 체험을 말해주듯이 너무나도 예수님을 생생하게 증언했습니다. 너무나도 극심한 반전이 바오로의 삶 속에 있었고, 그것은 예수님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에 관한 가장 확실한 증거로 남아 2천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무슨 말을 지어내어서가 아닙니다. 그가 한 일은 오직 한 가지, 오늘 제1독서의 말씀에서처럼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증인의 역할”(사도 22,15)이었습니다.
바오로는 그 말 한마디를 평생에 걸쳐 실천했고, 그의 개종사건은 인류의 구원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 됩니다.
우리도 우리의 믿음에 관하여 이처럼 증언을 잘하면 바오로 사도처럼 무게감있고 더욱 가치있는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먼저 우리가 보고 듣는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증언'은 내가 받아들인 것을 전달하는 것이기에, 보고 듣는 것이 참되고 좋은 것이면 증언하는 내용도 참되고 좋은 것입니다.
누군가를 폄하하거나 할 생각은 없지만 인터넷과 다양한 매체를 통해 우리가 보고 듣는 것들 중에는 정말 ‘쓰레기보다 못한 것’들도 많다 싶습니다. 때로는 내 입에서 나오는 말과 생각들도 그와 같지 않을까 싶어 돌아볼 때도 생깁니다. 그런 불필요하고 거짓된 말과 생각의 홍수 속에서 우리가 원하지 않더라도 ‘그다지 참되지 않고 좋지 못한 것들’을 보고 듣습니다. 그러기에 정말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좋은 것을 담기 위해 우리의 눈과 귀를 소중히 다루어 봅시다. 그 안에 예수님, 하느님이 담겨있으면 더 좋겠습니다.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사도 2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