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공동체에서 일하는 신부들을 ‘사목자(司牧者)’라고 하고, 공동체를 위하여 사목자가 하는 행위를 ‘사목(司牧)’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용어 가운데 ‘사목적(司牧的) 배려(配慮)’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에도 법과 규정이 있는데, 어느 곳이나 그러하듯 법과 규정은 사람들에게서 생겨나는 다양한 삶의 변수를 다 수용해주지 못하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목자가 교회의 규정을 지키기 어려운 상황에 놓인 교우의 상황을 감안하여, 그 상황에 맞게끔 교회법규를 지킬 의무를 완화해주거나 자신의 직권으로 - 모든 규정에 다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 지난 과오를 면제해주는 경우를 말합니다.
따라서 ‘사목적 배려’는 사목자가 자신의 직권으로 일종의 예외를 허용한다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 ‘배려(配慮)’가 남용될 수는 없습니다. 예외가 많으면 원칙이 소용없을 테니까요. 우리는 교회의 법규 속에 하느님의 뜻과 섭리가 담겨있음을 믿기 때문에 이를 최대한 지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지키려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는 불가항력적 상황이 있음을 인정하게 될 때에, 그 사람에게 교회의 법규가 죄책감을 가중시킨다거나 죄책감으로 인해 신앙 자체를 멀리하게 될 때에는 그 사람의 ‘영신적(靈神的) 이익(利益)’을 위해 예외를 인정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배려’는 ‘동정(同情)’과는 좀 구분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힘들어하거나 어려움을 겪는 이를 두고 안타까운 마음을 느낀다는 면에서는 유사하지만, ‘배려’는 도움을 주는 실천적 행위 자체를 의미하는 바가 더 강한 반면 ‘동정’은 그저 안타까워하는 마음에만 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비유적으로 달리 표현해 본다면 ‘동정’은 딱한 사정을 겪는 이를 두고 도움을 줄 수도, 주지 못할 수도 있는 ‘가능(可能)의 상태’입니다. 반면 ‘배려’는 딱한 사정을 겪는 이에게 이미 도움을 주고 있는 ‘현실(現實)의 상태’를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말합니다. 진정한 사랑과 관심은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배려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여러 가슴아픈 사연과 딱한 사정을 접할 때 동정심을 가지겠지만 이를 배려하는 실천으로 옮기는 데에 얼마나 성공하고 계십니까?
오늘 복음은 루카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초기 공생화로 장면의 일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에 관하여 예언하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이는 과연 예언 곧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이루어질 내용입니다. 물론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지겠지만, 어느 시점 이전까지는 이루어질 가능성만 존재하는 ‘가능의 상태’에 관한 내용이겠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읽으신 후 다음과 같이 선언하십니다 :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이 선언은 예언이 당신에게서 이루어진다는 뜻, 곧 예수님 당신이 바로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그와 동시에, 언젠가는 이루어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수동적인 기다림만 지속되는 상황에서 더 이상 그 때를 미루지 않고 당신께서 몸소 예언자의 말씀을 실행에 옮기겠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러 다니실 때에 가난한 사람에게 기쁨을, 갇혀 있는 이에게 해방을, 눈 먼 이에게 시력을, 억압받는 이에게 자유를 선사하십니다.
죄의 굴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안타깝게 여기는 동정심은 예수님이 아니더라도 많은 이들이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 정도의 능력이 되니까 동정심에 그치지 않고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배려하며 베풀 수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메시아의 시대가 오기를 바란다면 지금 나부터 이 ‘가능성’을 ‘현실화’시키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의 이 선언과 그에 뒤따르는 모범을 통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사목적 배려이든 우리가 일상 속에서 서로에게 베푸는 배려이든, 그 배려는 지금 실행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공동체의 규정이나 조직체계에 다 담을 수 없는 허점과 한계, 그것을 채워주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안타까움을 느낀다면 그것을 배려로 실천해보고자 더 노력하는 훈련은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이르는 그날까지 지속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배려를 통해 누군가를 인도하고자 하는 방향이 하느님의 뜻과 그 나라일 때에, 우리는 먼 미래에나 이루어질 것 같던 메시아의 시대, 하느님의 나라를 오늘의 현실 속에서 건설해가는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