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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강론

  연중 제33주일인 오늘은 보편교회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특별히 기도하는 날로 정하고, 함께 기도하는 날입니다.

교황님께서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마음에 관하여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말씀을 강론 대신에 전합니다. 내용이 좀 많습니다만, 내용을 요약하여 전하는 것이 오히려 말씀의 뜻을 다 전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못하는 듯 하여, 전문을 그대로 올립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5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담화

(20211114, 연중 제33주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다”(마르 14,7)

 


1.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다”(마르 14,7). 예수님께서는 파스카가 있기 며칠 전에 베타니아에 있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 식탁에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복음사가가 말한 것처럼, 어떤 여자가 값비싼 향유가 가득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그 향유를 부었습니다. 이는 무척 놀라운 일이었고, 이에 대한 두 가지 서로 다른 해석이 나왔습니다.

 


첫 번째 해석은, 제자들을 비롯하여 그 자리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느낀 불쾌함이었습니다. 그들은 노동자의 일 년 치 월급과 맞먹는 삼백 데나리온이나 하는 향유 값을 따지면서, 그 향유를 팔아 번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유다가 이 역할을 합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요한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유다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요한 12,5-6). 이러한 심한 비난의 말이 배신자의 입에서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이를 존중하지 않는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저버리는 것이고 또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이와 관련해서 오리게네스는 다음과 같이 강한 어조로 말합니다. “유다는 가난한 이들을 걱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 만약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어떤 이가 교회의 돈주머니를 맡아 유다처럼 가난한 이를 대변하면서도 그 주머니 안에 있는 것을 가로채 간다면, 유다와 똑같은 사람입니다”(「마태오 복음 주해」[Commentarii in Matthaeum], 11, 9).

 


두 번째 해석은 예수님의 해석으로, 이는 여자가 보인 행동의 깊은 뜻을 이해하게 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를 가만두어라. 왜 괴롭히느냐? 이 여자는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다”(마르 14,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아시고, 그 여자의 행동에서 무덤에 묻히기 전 당신의 생명을 잃은 몸에 하는 도유임을 예견하신 것입니다. 이는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의 그 어떤 상상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당신께서 가난한 이들 가운데 으뜸이라는 사실을, 가난한 이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가난한 이를 대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이 여자의 행동을 받아들이신 것은 가난한 이들, 외로운 이들, 소외된 이들, 차별받은 피해자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여자만이 주님의 생각을 여성의 섬세함으로 이해했습니다. 이 무명의 여자는 어쩌면 시대를 거치면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폭력에 시달리는 모든 여성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무명의 여자는 그리스도의 삶에서 절정의 모든 순간에, 곧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순간, 돌아가신 순간, 무덤에 묻히신 순간 그리고 부활하신 순간에 특별하게 있었던 여자들 가운데 첫 번째였습니다. 여자들은 큰 책임을 맡는 자리에서 종종 차별받고 제외되지만, 복음은 여자들이 계시의 역사에서 주역이 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복음화 위대한 사명에 이 여자를 연관 지으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선포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마르 14,9).

 


2. 예수님과 이 여자 사이에 형성된 이 강한 ‘공감’과, 유다와 다른 이들이 느낀 불쾌함과는 반대되는 그 여자의 도유에 대한 예수님만의 해석은 예수님과 가난한 이들과 복음 선포 사이의 떼어놓을 수 없는 연결 고리에 대하여 깊이 성찰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하느님의 얼굴은 가난한 이들을 걱정하고 그들 곁에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얼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에서 가난이 운명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 가운데 계시는 당신 현존의 구체적인 표징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에서 예수님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삶에서, 그들의 고통과 어려움 중에, 그들이 내몰려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비인간적인 상황 속에서 예수님을 봅니다. 제가 거듭거듭 말씀드리는 것처럼 가난한 이들이 진정한 복음 전파자입니다. 그들은 복음화되고 주님의 기쁨을 나누며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도록 부름받은 첫 번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마태 5,3 참조).

 


가난한 이들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복음화시킵니다. 그들은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의 참 얼굴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들은 신앙 감각(sensus fidei)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통 속에서 고통받으시는 그리스도를 알아 뵙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복음화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새로운 복음화는 가난한 이들의 삶에 미치는 구원의 힘을 깨닫고 그들을 교회 여정의 중심으로 삼으라는 초대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 뵙고, 그들의 요구에 우리의 목소리를 실어 주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친구가 되고, 그들에게 귀 기울이며, 그들을 이해하고, 하느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신 그 신비로운 지혜를 받아들이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임무는 증진과 지원의 계획이나 활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촉구하시는 것은 과도한 행동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다른 이를 ‘어떤 의미에서 나 자신과 하나’라고 여기며 다른 이를 향하여 쏟는 관심입니다. 이 사랑의 관심에서 그 사람에 대한 참다운 관심이 시작되고 내가 실질적으로 그의 행복을 추구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198-199항).

 


3.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의 곁에 계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운명을 함께 나누십니다. 이 사실은 시대를 막론하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주는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다.”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의 의미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 때문에 우리는 그들에게 무관심해져서는 안 되고, 오히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상호 나눔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 공동체 ‘밖’에 있는 이들이 아니라, 우리의 형제자매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어려움과 소외를 덜어 주고 잃어버린 그들의 존엄성을 되찾아 주며 그들에게 꼭 필요한 사회 통합을 보장하려고 노력하면서 그들의 고통을 나누어야 합니다. 한편, 우리가 알고 있듯이 자선 행위는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전제로 하는 반면에 상호 나눔은 형제애를 만들어냅니다. 자선은 이따금 하는 것이지만, 상호 나눔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선은, 자선을 행하는 사람을 자기만족에 빠지게 할 위험이 있고, 자선을 받는 사람을 모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호 나눔은 연대를 강화하고 정의 실현을 위한 필수 기반을 마련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직접 보고 직접 만져보고자 할 때, 믿는 이들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압니다. 가난한 이들은 그리스도의 성사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예수님의 인격을 나타내고 그분을 가리킵니다.

 


가난한 이들과의 상호 나눔을 자기 삶의 계획으로 삼았던 모범이 되는 성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성인들 가운데 저는 사제 다미안 드 베스테르(Damien de Veuster) 성인을 생각합니다. 다미안 성인은 나환자들의 거룩한 사도입니다. 성인은 나병 환자들만이 갈 수 있는 격리 지역이었던 몰로카이 섬으로 가서 죽는 날까지 그들과 함께 살라는 부르심에 기꺼운 마음으로 응답했습니다. 성인은 두 팔을 걷어붙이고 가난하고 병들고 버림받은 이들의 삶을 개선하고자 할 수 있는 온갖 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성인은 모든 위험을 무릅쓰며 의사도 되고 간호사도 되어, 당시 ‘죽음의 식민지’라고 불리던 이 섬에 사랑의 빛을 비추었습니다. 성인은 결국 나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이는 자기 삶을 바쳐 돌보던 형제자매들과 운명을 온전히 나누었다는 표징이 되었습니다. 성인의 증언은 코로나19의 세계적 유행에 시달리고 있는 이 시대에 정말 시의적절합니다. 하느님 은총은,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티나지 않게 자신을 바치며 구체적인 방법으로 그들과 함께 나누는 모든 이의 마음 안에서 분명 작용합니다.

 


4. 우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라는 주님의 초대에 온 마음을 다하여 응답해야 합니다. 먼저 이러한 회개는 온갖 형태의 가난을 알아보도록 마음을 여는 것이고,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에 맞갖게 살아가는 삶의 양식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종종 가난한 이들은 별개의 사람들, 곧 특별한 자선 봉사가 필요한 ‘부류’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러한 사고방식을 바꾸고, 상호 나눔과 참여라는 도전 과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지상의 보물을 모으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지상의 보물은 안심해도 될 것이라는 환상을 주지만 실제로는 한낱 부질없고 덧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참된 행복과 기쁨을 이루는 데에 망설이도록 하는 모든 구속에서 기꺼이 자유로워지겠다는 마음을 요구합니다. 이는 영원한 것, 곧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망가뜨릴 수 없는 것(마태 6,19-20 참조)을 깨닫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역시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대세를 거스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신앙의 눈으로 볼 수 있고 온전한 확신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만을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 19,29). 재물, 세속적 권력, 허영심을 버리고 가난한 이가 되는 선택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우리 삶을 사랑으로 내어 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충분히 좋은 의도를 지녔지만 세상을 바꾸는 데에는 쓸모없는 단절된 존재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총에 결연히 우리 자신을 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은총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을 증언하고 이 세상에서 우리 존재에 대한 확신을 회복하도록 해 줄 수 있습니다.

 


5.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표현하라고, 또한 언제나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초래하고 있는 온갖 극단적인 형태의 도덕적 사회적 불의를 인식하라고 우리를 다그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자신의 빈곤에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소수 특권층의 이익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경제 체제에도 버거운 짐이 된다는 생각이 확산되는 듯합니다. 윤리 원칙들을 도외시하거나 그 가운데 몇 가지 원칙만을 골라 선택하는 시장은 이미 불안정한 상황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비인간적인 조건들을 조성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빈곤과 배척이라는 새로운 덫들이 놓이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인도주의적 인식과 사회적 책임이 결여된 비양심적 경제와 금융의 주체들이 이러한 새로운 덫을 쳐 놓은 것입니다.

 


지난해 우리는 가난한 이들의 수를 늘린 또 다른 재앙인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을 겪었습니다. 이 사태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고통과 죽음을 동반하는 경우는 아니라고 해도 그들에게 빈곤의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가난한 이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안타깝게도 앞으로 얼마간 계속 늘어날 것입니다. 어떤 나라들은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에 심각한 타격을 입어 여전히 고통받고 있기에, 국민 가운데 가장 힘없는 이들은 기초 생필품 부족에 시달립니다. 무료 급식소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은 이처럼 악화된 상황을 드러내는 가시적인 표지입니다. 일부의 이윤을 추구하는 일 없이 전 세계 차원에서 바이러스와 싸우는 데에 가장 적합한 수단들을 찾아야 합니다. 실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많은 아버지와 어머니, 젊은이를 포함하여 실직자를 위한 구체적 대응이 특히 시급합니다. 하느님께 감사하게도, 많은 이들이 보여 준 사회적 연대와 관용은 인간 증진을 위한 장기적인 계획과 함께 이러한 국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6. 그렇더라도 불분명한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무관심만을 마주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성가신 존재로 여겨지는 수백만 명의 가난한 이들에게 어떻게 구체적인 응답을 줄 수 있습니까? 어떤 정의의 길을 따라야 사회적 불평등을 극복하고, 짓밟히곤 하는 인간 존엄을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개인주의적 생활양식은 빈곤을 만들어 내는 공범이고, 종종 가난한 이들에게 그들 처지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전가합니다. 그러나 가난은 운명이 아니라 이기심에서 비롯된 결과입니다. 그렇기에 역량의 보완과 역할의 다양성이 상호 참여를 위한 공동의 자원이 될 수 있도록, 모든 이의 재능을 귀하게 여기는 발전 과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유한 이들’이 지닌 많은 형태의 가난은 ‘가난한 이들’이 지닌 부유함으로 치유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부유한 이들이 서로 만나 알아갈 수 있으면 됩니다! 서로 나누고자 할 때, 그 누구도 아무것도 내어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받기만 하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들도 베푸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너그럽게 응답하는 법을 그들은 잘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앞에 수많은 나눔의 모범이 있지 않습니까! 가난한 이들이 우리에게 연대와 나눔을 가르쳐 주는 때가 많습니다. 실제로 가난한 이들은 무엇인가 부족한, 생필품을 비롯하여 흔히 많은 것이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모든 것이 부족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들은 그 어떤 것도 그리고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하느님 자녀로서의 존엄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7. 이러한 까닭에 가난에 대한 다른 접근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접근은 정부와 국제기관이, 지금 세계를 휩쓸고 있으며 다가올 수십 년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새로운 형태의 빈곤에 대응할 수 있는 미래지향적인 사회 모델로 이어가야 하는 도전 과제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마치 제 탓으로 가난한 처지에 놓이기라도 한 것처럼 소외된다면, 민주주의의 개념 자체가 위기에 빠지고 모든 사회 정책이 파탄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문제 앞에서 우리가 무능해지곤 한다는 것을 겸허히 고백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추상적으로 말합니다. 우리는 그저 통계만 내고 몇 편의 다큐멘터리를 찍는 것으로 감동을 자아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가난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자유의 신장을 향한 창의적 계획을 세우게 하는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돈을 가지면 자유가 생기고 커진다는 생각은 우리가 마땅히 거부해야 하는 환상입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효과적인 봉사는 우리를 행동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또한 이러한 봉사는, 너무 빈번하게 익명의 소리 없는 존재가 되곤 하지만 우리의 도움을 청하시는 구세주의 얼굴이 아로새겨져 있는 이러한 인류의 일부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증진할 가장 적절한 방법들을 찾게 해 줍니다.


8.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다”(마르 14,7). 이 말씀은 선행의 모든 기회를 결코 놓치지 말라는 초대입니다. 그 배경에서 성경의 오래된 명령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너희 동족 가운데 가난한 이가 있거든, 가난한 그 동족에게 매정한 마음을 품거나 인색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너희 손을 활짝 펴서, 그가 필요한 만큼 넉넉히 꾸어 주어야 한다. …… 그에게 줄 때에 아까워하는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이 일 때문에,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가 하는 모든 일과 너희가 손대는 모든 것에 복을 내리실 것이다. 그 땅에서 가난한 이가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신명 15,7-8.10-11). 같은 맥락에서 바오로 사도도 자기 공동체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루살렘의 초기 공동체에 속한 가난한 이들을 돕되 다음과 같이 하라고 권고하였습니다.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이는 자선을 베풂으로써 양심의 짐을 덜어내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가난한 이들을 향하여 만들어 온 무관심과 불의의 문화에 맞서는 문제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의 말을 떠올려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너그러운 이들은 가난한 이들의 행실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지 말고 다만 그들의 가난한 처지를 개선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의 유일한 탄원은 그들의 가난과 그들이 놓인 궁핍한 처지에 대한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악인이라도, 필요한 양식이 부족하다면 그들을 굶주림에서 해방시켜 주십시오. …… 자비로운 이들은 궁핍한 이들에게 항구와 같습니다. 난파 사고를 당한 모든 이를 환대하고 위험에서 빠져나오게 해 주는 항구인 것입니다. 항구는 그들이 악인이든 선인이든, 그들이 그 누구든 상관없이 쉬게 해 주는 피난처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가난이라는 난파에 시달리는 사람을 보거든 그를 판단하지도, 그의 행실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지도 말고 불행에서 그를 구해 주십시오”(「라자로에 관한 강해」[De Lazaro homiliae], II, 5).


9. 가난한 이들의 필요에 대한 인식을 증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난한 이들의 삶의 처지가 바뀌듯 그들의 필요도 늘 변화합니다. 실제로 오늘날 세계에서 경제 번영을 더 누리는 지역의 사람들은 빈곤에 대처하려는 의지가 예전보다 덜합니다. 우리가 익숙해진 상대적 풍요의 상황이 희생과 손실을 받아들이기 더 어렵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손쉽게 얻은 결실들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무엇이라도 할 태세를 갖춥니다. 그 결과 그들은 공포와 불안, 경우에 따라 폭력까지 불러오는 온갖 방식으로 분노하고 느닷없이 신경질 부리며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의 미래를 건설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러한 태도들 자체도 우리가 무시해서는 안 되는 가난의 여러 형태입니다. 현대 세계에서 복음 선포자가 되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라는 시대의 징표들을 읽어내는 열린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가난한 이들의 필요에 그 즉시 도움을 주는 일이, 인류가 오늘날 겪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빈곤에 대한 대응으로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선의 새로운 징표들을 구현하기 위한 장기적 안목을 갖추는 일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다섯 번째 해를 맞이하는 세계 가난한 이의 날 거행이 우리 지역 교회 안에서 점점 더 뿌리내리고, 가난한 이들이 어디에 있든 그들을 직접 만나는 복음화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이 문을 두드리기만 기다리고 있을 수 없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집으로, 병원과 요양원으로, 거리로, 때로는 그들이 눈에 드러나지 않는 사각지대로, 그리고 쉼터와 보호소로 그들을 찾아가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어떻게 느끼는지,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지, 마음속으로 무엇을 갈망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프리모 마촐라리(Primo Mazzolari) 신부의 간절한 애원에 우리 마음을 함께 모읍시다. “가난한 이들이 있는지, 그들이 누구이며 얼마나 많이 있는지 저에게 묻지 말아 주시기를 당신께 청하나이다. 그렇게 물으시면 저희가 양심과 마음을 울리는 호소를 회피하려는 술수를 부리거나 변명을 하게 될까 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 저는 가난한 이들의 수를 헤아려 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숫자로 셀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수를 헤아릴 것이 아니라 그들을 품어 안아야 합니다”(『아데소』[Adesso], 7-15항, 1949.4.). 가난한 이들은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도 가난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진실되이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복음적이겠습니까. 우리도 가난하다고 말할 때에만 우리는 참으로 가난한 이들을 알아보고 그들을 우리 삶에 받아들이며 그들이 구원의 도구가 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2021년 6월 13일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프란치스코

 


추신) 며칠 전부터 저희집 노트북이 말썽을 부려 수리가 완료될 때까지 며칠간은 강론을 올리기 어려울 듯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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