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가? 가난을 이해하지 못하면 가난한 사람을 사랑할 수 없고, 가난한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면, 하느님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 또한 불가능할 것이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잉태와 출생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명령이자 사명이며 요구이자 결단입니다. 인간은 도전받지 않고서 진정한 자신이 되지 못합니다. 자유를 행사하여 인간이 되는 것, 그것이 우리 존재의 법칙입니다. 자유로이 인간이 되는 이 과정에는 유혹과 시련이 따릅니다.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잘못될 위험 때문에 인간은 인간 본성의 잠재적 반역자로 살아갑니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가난한 자’가 되셨다는 것, 하느님 앞에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의미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초월적인 하느님의 총체적 요구에 직면하여 인간 정신의 빈곤을 선언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사탄은 이러한 자기 포기, 이 철저한 ‘가난’을 방해하려 합니다. 사탄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인성 안에 있는 하느님의 무력함의 힘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탄의 유혹은 하느님의 자기 비움에 대한 공격이며, 영적 풍요에 대한 거부의 유혹입니다. 하여 인간을 향해 ‘너는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 라는 것이 사탄의 슬로건입니다. 그것은 사악한 자가 우리에게 주어진 인간성에 대한 진리를 거부하도록 촉구하는 것이며, 무수한 변형으로 우리 앞에 제시하는 유혹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비참함 속에 몸을 담그시고, 인간의 길을 끝까지 따라가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으로서 가난이라는 어두운 신비에서 벗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완전한 포기 안에서 예수는 자신의 존재 깊은 곳에서 일어난 일을 행동으로 완성하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인성을 고백하고 받아들이셨으며, 우리의 몫을 짊어지고 견디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다.”(필리 2,6-7) 그 분은 인간이 타고난 영적 빈곤에 대해 “예”라고 말하기 위해 온 마음을 다해 애쓰며 우리와 함께하셨습니다. 그렇게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전적인 헌신의 유산, 곧 우리의 빈곤에 대한 하느님의 신실하심의 증거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영적 가난의 성사이며, 죄 많은 세상을 향한 참 인간의 성사입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자신의 인간성에 충실했고, 완전한 순종으로 그것을 받아들였다는 표시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참 인간이 되는 방법을 봅니다. 그에게서 인간의 상상할 수 없는 높이와 깊이를 봅니다. 그에게서 인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타고난 가난을 예리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그의 존재 자체가 그분의 아빠(Abba), 아버지에 대한 신비한 의지의 현현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것처럼 사람이 된다는 것은 영의 가난을 실천하는 것이며, 우리의 타고난 가난을 의지의 순종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만남이 참되려면 영적 가난에서 영감을 얻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접근하게 하려면 마음을 열어 그 사람의 독특한 성격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가난의 다른 이름은 비움입니다. 우리 자신이 비워질 때 하느님의 공간이 열리며, 타자에 대한 연민의 공간도 열립니다. 우리는 비움을 통해서만 자신을 개방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으며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 우리의 삶은 존재의 따뜻함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백천본당 주임 | 채홍락 시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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