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좋아하는 아들과 그 아들이 게임에 너무 빠질까봐 걱정하는 어머니가 있습니다. 새로운 게임이 발매되어 여기저기서 광고가 나옵니다. 이 광고를 보면 두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아들은 ‘새로운 게임이 재미있을 것 같은데 한 번 사볼까’라고 생각할 것이고, 어머니는 ‘우리 아들이 저 게임에 빠지면 어떡하나’ 혹은 ‘또 공부 안하게 생겼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같은 것을 두고도 이렇게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와 유사한 장면을 봅니다.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은 똑같이 사람들이 음식을 먹는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먹기 전에 손을 씻는지의 여부만을 살피는 반면,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지키는 그들을 위선자라고 질타하십니다. 손을 씻는 위생법이 생긴 이유는 분명 사람들의 건강을 위해서일진대, 오히려 그 법이 사람을 속박하게 되는 것은 그 법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사람의 마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음식을 먹기 전에 정결예식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정결예식을 지키지 않은 굶주린 이들을 외면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법을 있는 그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뜻대로 가르치려 드는 오만함과 그밖의 수많은 나쁜 생각들이 생겨난 것은 바로 사람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부족한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죄악을 단죄하는 말씀을 들려주심으로써 우리를 단련시키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법,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머물러있다 하더라도 그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사실 그 법과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자리가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씀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도 진정으로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리라는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지금 성체성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과연 죄많고 어리석은 사람들과 몸소 함께 생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참되고 옳다는 확신을 가지지 못하셨다면, 십자가의 희생이 이루어졌겠습니까? 지금 거행하는 구원의 성찬이 있기나 했겠습니까? 아버지의 뜻이기에 기꺼이 따른 예수님의 무한한 신뢰가 인류구원을 가져다 주고, 부활도, 영원한 생명도, 무한한 하느님의 영광도 드러내 보여주었습니다.
이처럼 비록 내 뜻과 판단이 달라서 불신이 생기고, 나쁘거나 어리석은 생각이 든다 하더라도, 우리는 주어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있는그대로 받아들이고 실행할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법과 계명과 말씀 안에 담긴 하느님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헤아리고, 그것을 먼저 이루려는 노력이 바로 그러한 믿음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오늘 제1독서의 신명기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을 하나도 보태거나 빼놓지 말고 지켜라’고 가르칩니다. 제2독서 말씀에서 야고보 사도도 우리 안에 심겨진 하느님의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고 그대로 실천하라고 가르칩니다.
사람의 지혜와 전통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뜻보다 우선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지혜로운 사람이 될지언정 오만한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가장 우선시하는 굳은 믿음에서 출발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에, 내 뜻이 하느님의 뜻과 다를 수 있다는 것도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나 내 뜻과 판단이 다른 그순간에 하느님의 말씀과 법을 따르는 그 순명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향한 열렬한 사랑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그 신뢰가 참된 구원과 행복을 이루는 공로가 되도록 배려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인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법을 실행하도록 불리움받는 모든 순간에, 내 생각이나 판단, 느낌보다 그 계명의 뜻과 정신을 먼저 헤아리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한주간을 보내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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