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에게 있어 어떤 사안을 두고 판단 내지 평가할 때에 ‘합리적(合理的)인가’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사실 ‘합리적’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사람은 ‘이치에 닿는가’를 따져본다는 뜻이겠습니다만, 순도(純度) 100% 이치에 들어맞지 않는 것 또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헤아리는 이치(理致)에 한계가 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합리성(合理性)’은 인간적 선택에 있어 참고할 만한 좋은 잣대이지만, 절대화시켜서도 안될 기준이라고 해야 옳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신앙’은 이치를 초월한 영역도 포함하고 있기에 ‘합리적이라고 여기기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신앙 자체에 배타적인 사람들은 신앙과 종교를 ‘비과학적’, ‘비합리적 모순’으로 치부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다 헤아릴 수 있는 대상이라면 ‘신앙’이라는 의지적 행위도 필요없을 테지만, 어쨌거나 그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서도 ‘합리성’이라는 잣대는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은 ‘합리성’과는 무관한 행위일까요? 신앙인들은 ‘비합리적인 모습을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적어도 신앙인들은 ‘더욱더 합리적이고자 노력하는 성향을 띤 사람’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같은 의견이나 제안을 들어도, 합리적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의 이야기를 더욱 신빙성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합리적 이성’으로 온전히 밝혀내지 못하는 신비로운 ‘신앙의 영역’에 대한 이야기를 합리적인지 가늠할 수 없다면, 적어도 ‘합리적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비합리적이라고 결론내지 못함’을 통해 신앙의 신조(信條)는 들어볼 만한 제안, 경청해 봄직한 이야기, 믿어 봄직한 가르침으로 다가올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장면, 예수님께서 첫 제자들을 부르시는 모습을 통해서도 이를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어부였던 네 명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예수님은 논리의 비약과도 같은 제안을 하십니다 :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 1,17)
복음은 앞뒤가 생략된 듯한 이 제안을 받은 제자들이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1,18)고 전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장면(1,14-15)을 제자들도 보았을 것입니다. 그 가르침에 호기심이 일기도 하고, 예수님을 따라다녀 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자신들에게 들어온 이 뜬금없는 제안을 이해할 수 없었다면, 적어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에게 신뢰감을 가져야 예수님을 따라 나설 수 있었을 것 아닙니까?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행동 등에서 ‘납득할 수 있는 인간적 합리성’과 ‘헤아릴 수 없는 신적(神的) 신비로움’이 동시에 느껴졌기에 예수님의 제안을 따를 수 있었겠죠?
우리가 신적 능력(神的 能力)을 지니지 않은 평범한 한 사람이라면, 우리가 믿는 바를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전하려 할 때에도 이 ‘인간적 합리성’이라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 ‘저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뭔가 있다(혹은 없는 말은 아닐 것이다)’ 하는 정도의 “비합리적이라는 핑계로 물리치기는 어려움” 같은 것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의 불완전한 ‘합리성’ 이상의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 채워주셔야겠지요.
이렇듯 ‘보다 합리적이고자 노력하는 경향’은 우리가 하느님을 올바르게, 잘 믿기 위해서도 필요할 것입니다. 이치에 맞지 않는지를 따져보면서도 ‘틀렸다’라고 거부할 수 없는 것(그러나 스스로 설명은 못 해 내는 것) 속에서 하느님의 이치가 오묘함을 체험하게 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또한 사람을 현혹하는 유사종교와 같은 꾀임으로부터 자신의 신앙을 지키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 주저없이 예수님을 따라나서게 되었던 그 이유가 우리 각자에게서도 조금씩 더 엿보이도록 함께 노력함으로써 신앙을 지키고 또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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