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생 시절, 방학때가 되어 집에 돌아오게 되면 성당에 나가 보좌신부님의 일을 돕는답시고는 여러 일과를 거치고 저녁 늦게까지 사람들과 어울리고 먹고 마시는 등으로 인해 늦은 시각, 심지어 새벽에야 집에 들어가기가 일쑤였고, 아버지께서 아침일찍 출근하시거나 야근을 마치고 퇴근하실 때 잠들어 있는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이것이 아버지께서 제게 가진 큰 불만거리 중 하나였고, 가끔은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아버지께 대한 관심이 없다는 표시가 이렇게 드러난다는 것을 뒤늦게 생각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신학생이라는 이유로 혹은 방학중에 성당의 여러 일과 행사를 통해 또래 젊은이들과 어울리고 신부님을 돕는 여러 가지 일에 골몰하는 것, 제 관심은 오로지 그것에로만 향해 있었고 그래서인지 다른 것들에는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았던 것이 원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성당에서 이루어지는 활동과 만남이 최우선이었고, 그것이 가장 즐거웠기에 심지어 가족에게도 무심했던 자신을 돌아보니, 늦게 잠자리에 들어 피곤하다 하더라도 때로는 일찍 출근하시는 아버지와 인사 한 마디 나누는 것조차 해 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일이지만, 졸린 눈을 비비며 잠시 깨어 일어나서 ‘잘 다녀 오세’, ‘잘 다녀오셨어요’ 라는 인사라도 드린다면 그것이 아버지의 생활에 대한 관심이며 아버지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그때는 잘 몰랐습니다.
오늘 대림시기를 시작하는 우리가 듣는 일성(一聲), 첫 번째 외침은 항상 “깨어 있어라”(마르 13,37)는 말씀입니다. 살아 움직인다 하면서도 무언가에 눈감고 있고, 무뎌져 있고, 우리 뇌리에서 잊혀져 있는 무언가에 대해서 감각을 일깨우고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제가 저 혼자만의 생활리듬 속에서 가족들에게 무심했던 때처럼 우리도 깨어나야 합니다. 일상에서 부족함이 있었다면 좀더 적극적인 관심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코로나로 인하여 평소와 다른 시간을 지내오면서 이전에 비해 별도로 마음써야 하는 것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더 긴장하고 집중해야만 하는 것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는 마땅히 그래야만 했겠지만, 수개월의 시간을 그렇게 지내오다 보니 한편으로는 그런 이유로 소홀하거나 마음쓰지 못했던 것, 잊고 있었던 것, 놓치고 지낸 것들도 있지 않을까요?
미사가 없어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느끼지만 그 허전한 마음에만 젖어 있고, 기존의 상황에 비해 몇 가지 제약이 생기고 나니 무기력함에 익숙해지기도 하겠지요. 그러면서 아직은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이유를 대며 무심해진 것들이 적잖이 있을 터인데, 그것들에 마음을 열고 감각을 일깨워야 하는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 개인적 영성생활, 기도하는 습관, 기도의 지향 찾기, 공동체 생활 등 말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와 마주하실 때에 너무 준비없이 있다가 화들짝 놀라거나 민망하지 않도록, 그분의 오실 때를 기억하며 깨어서 기다리는 마음으로 이 대림시기를 새로이 시작해보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