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의 말씀을 들으면 잘 이해되지 않는 구석이 있습니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6,8ㄱ)”는 대목입니다. 의로움을 추구해야 할 우리들을 두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편법을 일삼는 집사를 칭찬한다는 말씀을 어떤 가르침으로 알아들어야 할까요?
이 말씀은 세상의 논리처럼 누구나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그 이익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16,8ㄴ)고 말입니다. 실제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 옳은 것인지, 선한 것인지를 따지면서 망설이는 모습을 우리 신앙인들에게서 종종 발견합니다. 그러면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씀일까요? 죄를 피하고자 조심하는 우리의 노력이 헛되다는 뜻일까요?
복음은 ‘이익이 되는 것을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행동하는 진취적 삶의 태도’를 강조할 뿐, 그로 인해 이익을 얻었다거나 이를 위해 불의한 방법을 동원하는 것을 장려하지는 않습니다. 바꿔 말하면, 복음에 나오는 집사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이익 혹은 미래를 대비해야 할 분명한 이유 - 자신의 게으름으로 인하여 해고당한 이후의 생활에 대한 걱정 - 가 있을 때에 평소보다 민첩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로 복귀한 것처럼, 우리도 구원이라는 목표를 위해 필요성이 제기될 때에 적극적으로 그 필요성에 응답하는 자세를 갖추라는 요구가 이 비유 말씀의 참뜻이라고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저도 그러합니다만, 신중하게 잘 해보려는 세심함 때문에나 혹은 너무 많이 따지다가 기회를 놓쳐 버림으로써 애덕실천도, 봉사나 선행도 못하는 때들이 있습니다. 무작정 덤벼들라는 말은 아니겠지만, 구원의 공로(功勞)를 쌓는 것보다 다른 것들에 너무 마음을 빼앗겨 그 기회를 놓쳐버리는 때가 있다면 그 구원의 공로를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이익으로 여기는 믿음을 더하고자 노력하고 또 기도하는 것에서부터 구원을 향한 적극성을 길러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