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 중 끝자락의 말씀입니다 :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마태 21,32)
위의 말씀을 통해 믿음이라는 것은 ‘생각을 바꾸는 과정’처럼 한순간의 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안에서 연속되는 고백을 통해 단단해지고 성장하는 것임을 생각해 봅니다.
복음의 비유에서 큰 아들은 처음에 거부하는 대답을 했지만 결국 일하러 갔습니다. 그 아버지의 뜻을 거역했으나, 그 대답 이후 큰아들은 계속 아버지의 부탁을 곱씹었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일하러 갔고, 계속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기보다는 계속 간직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에 반해 작은 아들은 가겠다고 대답을 했지만, 일하러 가지 않습니다. 그 대답과 동시에 아들은 아버지의 부탁은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단지 아버지께서 명령, 부탁한 것을 그대로 이행했느냐도 중요하지만, 이 비유말씀에서 ‘실천’이 강조되는 이유는 ‘사랑’입니다.
아버지의 부탁이 계속 귓가에 맴돌고, 아버지의 마음을 계속 바라보며 헤아리는 것이 큰아들이 보이는 아버지께 대한 사랑이고, 아버지의 명령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아들은 결국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이행합니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더욱 중요시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자신이 ‘밭에 나가 해야 할 힘든 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로 여깁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안심시키지만 일하기 싫은 속내를 들키지 않고 아버지 면전(面前)을 벗어남과 동시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것입니다. 만약 나중에 작은 아들에게 아버지께 밭에 나가 일한다고 답했던 일을 묻는다면 갑작스런 이야기처럼 반응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그 대답과 동시에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의 상황에 대한 생각도 멈춰버렸을 듯 합니다. 이 또한 작은 아들이 아버지께 보이는 그 나름의 모습이며 부족한 사랑의 단면입니다.
자신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 사랑을 강조하는 가톨릭 교회는 윤리적으로 실천을 굉장히 중요시합니다. 실천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야고 2,17 참조)이라고 말하는 이 기조(基調)는 단순한 행동주의(行動主義)가 아닙니다. 생각과 고민, 판단과 결심 등으로부터 구체적 실천으로 이어지기까지의 과정은 사랑이 없으면 사랑하는 행위로 드러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에서 큰 아들이 ‘싫습니다’라고 대답함에서부터 밭에 나가 일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아들의 효성에 기인한 행위였듯,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고자 사랑을 실천하는 모든 과정이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믿음을 북돋우고 확인시켜주는 시간이며 계속적인 실천의 연속과정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과 더불어 함께 계시는 하느님과 그분의 뜻에 마음과 눈이 열린 모습으로 살도록 더욱 노력하며 한 주간을 보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