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도시락’이라는 말보다 ‘벤또’라는 말이 익숙한 세대입니다. 아마 저보다 더 윗세대 분들에게는 그 말속에 담겨 있는 의미는 더욱 남다를 것입니다. 학교에 ‘싸 가지고 갈 밥이 있다.’라는 것은 어른 세대에서는 사치인 분도 있었습니다. 점심시간만 되면 자존심 때문에 교실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와 수돗가 물을 들이켜고는 ‘꼬르륵’ 소리에 얼굴 붉어지던 때가 ‘벤또’의 뚜껑 안에 들어있는 어르신들의 이야기입니다.
선생님들로부터 ‘벤또’라는 말을 ‘도시락’이라는 말로 교정 받을 즈음 싸 가지고 갈 것은 ‘들고 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갈등하는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딱 그즈음에 살았던 저의 기억이 도시락 보자기 바깥으로 펼쳐집니다. 집에서야 어떻게 먹든 친구들에게 보이기 싫었던 보리밥 비율이 그 갈등의 원인이었습니다. 한 줌의 쌀과 아홉 줌의 보리쌀이 섞인 밥은 그렇게 먹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현실이었습니다. 쌀은 돈으로 바뀌어야 되고, 그 돈은 학비와 생활비로 넘어가는 부모님들의 살림이었습니다. 저에게는 친구들에게 도시락으로 드러날 가난에 대한 부끄러움이 더 컸습니다. 가족들의 눈을 피해 쌀밥을 두세 숟가락 욱여넣었던 기억 또한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우리도 모르게 어느 때부터 ‘더 맛있는 것,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게 먹고 살 만해졌습니다.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되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된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배고픔은 마치 조선시대 이야기처럼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련하기만 합니다. 더군다나 배고픔을 겪어 보지 못한 세대에게는 그 고통의 의미는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 것입니다.
올해 들어 재미있는 뉴스들이 있었습니다. 사막의 나라 아랍에미리트에 한국 농촌진흥청에서 벼농사 기술을 제공해주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 뉴스의 깊은 의미는 ‘농업기술의 선진성’을 홍보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국가는 몇 배의 돈을 주고 비행기에 싣고 있던 마스크를 가로채 갔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몇 배의 돈을 지불해야 되고, 위기 상황에서는 윤리고 동맹이고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누가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내 배가 고픈데 내가 먹을 것을 남에게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 배가 불러야 남에게 주고, 내가 먹고 남아야 양보합니다. 지금 우리는 인구가 폭증하고 환경이 격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오늘은 배부르지만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농민 주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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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생활의 문화가 공업이나 서비스 부문의 소득으로 살아가는 도시인의 생활수준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도록 배려하여야 한다.”(「어머니요 스승」, 125항)
교구 노동사목부장 김호균 마르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