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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님의 가문은, 충청도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권유로 그와 함께 서울 명례방 김범우 토마스에게 배워서, 한국천주교 창립 때인 1784년부터 1785 3월 사이에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역대 박해 때마다 많은 수난을 당했으며 12명에서 14명의 순교자와 많은 증거자가 탄생했습니다. 특별히 성 김대건 신부님의 아버지 성 김제준 이냐시오, 당고모 성녀 김 데레사, 증조부 복자 김진후 비오, 그리고 대구에서 순교하신 종조부 복자 김종한 안드레아를 배출한 가문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최방제 방지거, 최양업 도마와 함께 우리나라 사상 처음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183612 3일 마카오로 유학길에 올라 6개월 28일의 긴 걸음 끝에 이듬해 6 7일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한국인 최초의 근대적 서양학 해외 유학자로 신학뿐 아니라 신학을 공부하기 위한 기초 초중등 과정을 이수하고, 라틴어,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영어,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고, 또 당시의 국제정세도 보고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1845 8 17일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10명도 안 되는 조국 동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페레올 주교님의 집전으로 한국인 첫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1849년 부활 다음 주일에 사제로 탄생한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님보다도 4년이나 앞선 것입니다. 하지만 김대건 신부님은 청국 땅에서 조선교구로 부임할 날을 기다리고 있는 메스트르 신부와 동료인 최양업 부제의 입국로를 찾아 나섰다가 순위도에서 체포되어, 1846 9 16일 서울 새남터에서 26세의 젊은 나이로 군문효수형에 처해져 순교하게 됩니다. 사제로 서품되고 1 1개월여 만의 일입니다.

 

어린 소년이 짚신을 신고 걸었을 한겨울 7개월의 유학길, 이국에서의 유학 생활, 이국땅에서 들었던 아버지의 순교와 문전걸식하시는 어머니의 비참한 삶에 대한 소문, 내 나라로 돌아오는 험난한 여정, 나라에 잡혀서 겪었을 무수한 고초들

 

사람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유학생으로 배운 학문들을 아깝다고 생각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이 험하고 비참한 세상에서 우리가 우리의 가장 높으신 주인과 창조주를 알지 못하면 우리가 태어난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알고 천국을 차지하는 것이 진짜 삶이라고 알려주시고 보여주신 김대건 신부님은 우리 삶의 길잡이이십니다.

 

 

 

만촌3동본당 주임  김영철 라우렌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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