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자 요한의 탄생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미리 드러내는 예표(豫表)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구원의 서막이라는 점에서 오늘 대축일을 보내는 의의가 있습니다. 루카 복음은 요한을 가리켜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루카 1,15)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 요한의 부모는 아들의 이름을 짓는데 있어서 기존 전통이나 타인들이 납득할 수 있는 방법을 벗어난 방식으로 아기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었습니다. 이 부모들은 왜 이런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도 아기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으려고 했을까요? 어쩌면 이런 이유들이 있지 않았을까요?
천사의 계시를 받는 신비로운 체험 이후로 즈카르야는 말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놀랍고 또 답답했겠지요. 일종의 징벌을 받고 있는 즈카르야가 또다른 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겁을 집어먹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또하나 생각해 볼 만한 것은 '아이가 없어서 근심하고 낙심했던 부모로서 아들을 얻을 수만 있다면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다'는 그런 마음이 이유가 될 수도 있다 싶습니다. 아이가 없다는 것은 부모로서 실망스러운 일이기도 하겠거니와, 이스라엘 전통에서는 자녀를 많이 얻는 것 또한 하느님의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루카 복음에서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도 이렇게 말하죠 :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루카 1,25)
그밖에 다른 인간적 이유들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결국 이 모든 일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신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신비로운 체험이 있었기 때문이겠지만요. 천사의 이 말을 믿은 것이지요 :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루카 1,14)
그런데 세례자 요한의 탄생이라는 사건이 이루어지기까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이 감내하고 이겨내어야 했던 여러 고충과 유혹들을 생각해봅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인간적으로 충분히 납득이 가능하고 명분이 서는 선택지가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아이의 이름을 짓는 이 모습에서 우리도 배울 바가 있을 것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받아들이는 믿음의 순명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이들에게 그분의 은총과 사랑을 전하는 구원의 도구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신앙인답게 바람직한 일을 했던가’라는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서 '믿음으로 순명하는 자세'를 세례자 요한의 탄생사건을 통해 배울 수 있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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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감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