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북경에서는 몸이 많이 아프거나 하여 병원에 입원할 만한 정도의 상황이면 빨리 한국으로 가서 진료받으라고 권하죠. 그래서인지 병자에게 병자성사 집전이나 성체를 모셔가서 배령하게 해 드릴 기회가 많지는 않습니다. 이에 반해 노령화가 빨리 진행되는 한국에서는 거동이 불편한 분들에게 한달에 한번 이상 찾아가서 (여건이 허락되면 고해성사를 집전하고) 영성체를 시켜드리는 경우가 흔한데요.
이런 병자봉성체를 행하면서 가슴뿌듯한 일 가운데 하나가 있습니다. 어느 교우가 저를 찾아와서 누군가가 병이 들어서 누워있다거나 사고를 당해서 병원에 있다며 함께 가주기를 청하시는 부탁을 받고 걸음을 옮길 때입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들의 딱한 사정을 보고 내 일처럼 안타까워하며, 신부가 손이라도 한번 잡아주었으면 하고 간곡하게 부탁하시는 그 모습이 저를 행복하게 합니다. 왜일까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날의 교리에서 교회를 설명하는 개념 가운데 하나가 '그리스도의 신비체'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입니다. 그냥 한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한몸이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지체들이라는 뜻에서 신비체라고 합니다. 이 교리가 피부로 와닿는 것은 바로 교우분들의 이러한 관심과 정성 덕분이기 때문에 저는 신앙의 신비를 체험하며 살아가게 해주시는 교우분들에게 감사의 정을 느끼고, 이것이 제 믿음을 더해주기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오늘의 독서말씀은 바오로 사도의 개종사건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눈여겨 볼만한 사실이 있습니다. 사울, 그러니까 훗날의 바오로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잡아가두기 위해서 다마스커스로 가다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당신은 누구십니까?”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라는 대답이 들려옵니다.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입니까? 바오로는 단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사람을 박해했지, 예수를 실제로 본적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음성은 “너는 나를 박해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당신의 모범을 따라 사는 우리들을 가리켜 당신과 동일시하십니다. 예수님이 머리이시라면, 같은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모시고 살아가는 우리들, 하느님의 신적인 본성을 똑같이 간직하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저마다 모습과 사는 방식을 달라도 예수님과 연관이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하나의 끈으로 모두 이어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머리와 손과 발이 하나의 몸을 이루듯이 말입니다. 망치로 손을 때렸는데, 아픈 것은 손 뿐입니까? 온몸이 다 아프지 않습니까? 그 손이 다침으로써 모두가 불편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을 당신과 동일시하셨듯이, 우리도 이웃을 나와 동일시하고 그들의 기쁨도 슬픔도, 즐거움도 아픔도 모두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나누어 먹고 마시는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한 가족보다 더 가까운 한 지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형제, 자매라고 부릅니다. 내 이웃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며 그리스도의 고통입니다. 내 이웃과 나누는 것은 나에게 베푸는 것이며, 그리스도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비체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저에게 신앙의 신비를 체험하게 해주었던 교우들(그때는 대부분 할머니들이셨습니다)의 사랑을 다시 떠올려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과 사랑과 정성이 우리 삶안에서 더욱 많이 드러나도록 함께 노력하고, 이웃들을 위해 더욱더 많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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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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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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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함께 살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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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과 나누는 것은 나에게 베푸는 것이며, 그리스도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