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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강론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단호한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비록 마음이 아프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더욱 잘 되도록 억지로라도 이끌기 위해서 모진 말이나 꾸중을 하는 경우도 있겠고, 더 이상 악습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생활의 일부분을 과감히 포기해야 하는 경우 - 어떤 사람과의 관계를 당분간 멀리하는 것이나 직장을 버리는 경우, 어떤 욕심이나 꿈을 버리는 것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단호한 결단을 내리는 것에 순응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또한 나의 희생이 뒤따라야 할 때도 있습니다. 좋든 싫든, 내가 희생을 치르지 않고서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는 경우들 말입니다. 이런 경우들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양보와 타협을 하면서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원리와 원칙을 지키고 선을 행하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편하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상황을 이끌고 가고자 하는 것이 사람의 본심이기 때문인가 봅니다.

 

  이런 모습이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통해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우상을 숭배합니다.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에집트에서 이끌어내신 놀라운 일을 다른 우상의 공으로 돌림으로써 하느님을 버리는 것을 정당화합니다. 이러한 배신행위에 하느님의 진노가 내립니다. 당신의 손을 펼치시어, 큰 능력으로 에집트에서 구해낸 그 백성은 하느님의 사랑을 몰라줍니다. 그 이유는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주시는 하느님, 그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한데, 그 결단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의 욕심을 때로는 포기해야 하는데, 그 희생을 기꺼이 행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감염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거의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고 희생하고 양보하는데, 자신의 경제적 이익이나 개인적 욕심, 정치적 계산 등을 위해 그 숭고한 희생과 수고까지도 폄하하거나 왜곡하면서까지 이용하려 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의중만을 중요시하며 몰염치하거나 편협한 행위를 스스로 합리화하는 모습에 아쉬움과 씁쓸함을 느낍니다. 평소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각종 공직비리, 권력형 비리를 봐도 그렇고, 법치정신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의 행동 등에서도 자기 합리화가 얼마나 세상을 메마르게 만들고 사람들의 양심을 무디게 만드는가를 새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희생이 뒤따르고, 희생하려면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희생과 자기포기가 뒤따라야 할때에, 손해보고 아쉬움이 남는다고 미련을 두지 맙시다. 선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과 타협하는 것이 미덕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옳은 것이 아니라면 양보하지 않고 선하고 바른 말과 행동을 실천하며 오늘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뒤따르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회를 위해 보다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이들이 자기 합리화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기도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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