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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도록

 

주인이 좋은 밀알을 뿌린 밭에 사람들이 잠든 사이, 원수가 몰래 와서 가라지를 뿌립니다. 종들도 처음엔 몰랐지만 열매가 맺힐 때야 알아차립니다. “주인님, 밭에 좋은 밀을 뿌렸지 않습니까? 그런데 웬 가라지입니까?” 그러나 주인은 분노하지 않고 덤덤하게 대답합니다. “원수가 그랬구나.” 골라내어 다 뽑아 버리려는 종들과 달리, 주인은 수확 때까지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라고 합니다. 나중에 추수 때에 가라지를 먼저 뽑아내서 태워 버리고, 다음에 밀을 수확하겠다고 합니다. 주인의 판단은 현명할 뿐만 아니라 당연한 것입니다.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밀과 혼동할 수 있고, 가라지의 뿌리가 깊어 자칫 밀의 뿌리까지 함께 뽑힐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농부라면 당연한 판단입니다.


여기서 밀은 착한 사람이고, 가라지는 나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나쁜 사람과 착한 사람이 함께 살도록 내버려두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누가 봐도 나쁜 사람인데, 그 사람을 뽑아 버리거나 잘라 버리지 않고 내버려두라니? 너무 어이없어서 제자들도 다시 설명해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알아들은 그대로가 맞다고 다시 강조하십니다. 누가 봐도 나쁜 사람인데, 당연히 벌주고 내쫓아야하지 않을까? 그게 정의이고 하느님의 나라고 사람 살만한 세상이 아닐까?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이유는 단 하나, “너희가 가라지들을 뽑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주인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원수가 있으니 언제든 이런 일은 생길 수 있다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의 나라, 아직 자라고 있는 밀밭에는 선과 악, 희망과 절망, 성공과 실패, 사랑과 미움, 지혜와 어리석음이 공존할 것임을. 이땅 위의 밀밭은 아직 불완전한 세상임을 하느님은 담담히 받아들이십니다.


반대로 사람들은 빨리 가라지를 골라내어 없애버리려 했습니다. 전쟁의 역사 속에서만 아니라, 우리 가정과 이웃들 사이에서도 아주 사소한 일들 때문에 서로를 가라지라고 규정하곤 했습니다. 그 때문에 무죄하고 약한 이들이 희생되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정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불안하고 조급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우리는 적어도 내가 옳다는 신념으로 다른 이들을 비난하고 공격하지 말고, 대신 더 많은 사람들과 대화하고 더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자라가고 함께 공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가라지 몇 개를 바라보면서 저 밀밭을 “가라지밭”이라고 부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 밀밭에는 가라지보다 밀들이 더 많습니다. 그러니 우리 밀밭에 가라지가 섞여 있다고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추수할 그때까지 밀들을 잘 키워나가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죄인이라고 내치지 않으셨던 예수님의 눈엔 우리 모두가 밀밭에 뿌려진 좋은 밀알들입니다.

 

청도본당 주임 김지현 요한 신부

(2017년 7월 23일 연중 제 16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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