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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안 되는 하느님

 

"한 아이가 바닷가에서 물 웅덩이에 바닷물 퍼 담는다는 예화는 이제 그만 들었으면 좋겠어요.” 수년 전 어느 본당 자매님이 삼위일체 주일 강론 때마다 듣는 이야기에 질려서 이제는 그만 듣고 싶다고 저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비단 이 자매님뿐만 아니라 몇년간 신자활을 하신 분들이라면 삼위일체 교리는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교리가 아니고 ‘믿어야할 교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할 수 없어 바닷가 산책 중에 만난 아이의 대답을 듣고 삼위일체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접고 믿었다는 예화는 많이 들으셨을 줄 압니다. 그러니 더 이상 이 이야기는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하구요.


성부, 성자, 성령의 각 위격이 세 분 하느님이 아닌 한 분 하느님이시라는 교리.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저는 40여년을 살아왔지만 이해되지 않는 하느님을 너무나 많이 느끼고 경험해왔고 지금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되지 않는 하느님을 어떻게 믿어야 할까?’라는 의문을 지금도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고한 사람들이 억울한 사건사고에 휘말려 감옥에 갇히거나 소중한 목숨을 잃어야 했던 일, 남에게 도움을 주었을 망정 해코지 한 일 없는 사람이 난치병이나 불치병에 걸려 고생하고, 남을 극악무도하게 괴롭히는 사람들은 아픈 곳 하나 없이 건강하게 누릴 거 다 누리며 사는 모습들. 그런 극단적인 예가 아니더라도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이해할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오는 일상사들… 이해가 되시는지요?


삼위일체의 하느님만 이해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평범한 삶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이해되지 않는 하느님을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삼위일체 하느님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삼위일체의 하느님이 이해되지 않는 것’과 ‘내 삶의 어려움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무슨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연관성이라기보다도 도저히 ‘이해 불가’라는 공통점만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창조질서 안에 살아가는 우리들은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신앙과 삶의 괴리감과 이해 불가능한 신비. 이 또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한 부분입니다.

 

애초부터 우리가 하느님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을 이해한다면 더 이상 그는 하느님이 아니다.’라는 어느 성인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저는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들의 삶과 가르침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당연한 일 아닌가요? 이제 커서 보니 부모님과 선생님의 가르침이 전부는 아니어도 많은 부분 이해가 갑니다. 이것도 당연한 일 아닌가요? 하느님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하느님이 계시지 않다거나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면 위험할 수 있겠습니다. 마치 어떤 아이가 부모님을 이해하지 못하겠고,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확신하며 가출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이해되지 않는 삼위일체 하느님. 언젠가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서게 되는 순간 이해가 되지 않을까요?

 

용강본당 주임 이강재 요셉 신부

(2017년 6월 11일 삼위일체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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