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생 시절, 방학때면 여러 가지 본당일을 돕는답시고 - 물론 또래의 친구들과 놀기도 했습니다만 - 늦게 귀가하기 일쑤였습니다. 매일 새벽 1-2시에 들어오니 어느 부모님께서 좋아하시겠어요? 특히 어머니는 거실에서 TV를 보면서 아들을 기다리다가 깜빡 잠이 들곤 하셨는데, 그러다 잠이 깨면 어김없이 전화를 걸어옵니다. “어디냐? 지금 시간이 몇신데..”
어느날, 그날은 특별한 일도 없고 늘 귀가가 늦었던 탓도 있고 해서 그나마 조금 이른 저녁 10시 즈음 집에 왔습니다. 방에 들어가 조용히 다른 일을 하고 있는데, 12시가 다되어 갈 즈음 전화가 울립니다. 이밤중에 누군가 했더니 거실에 계신 어머니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 “어디냐? 지금 시간이 몇신데....”
어머니는 습관적으로 잠이 깨자마자 전화를 하신 겁니다.
예나 지금이나 저희 어머니는 제가 좋은 사제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며 응원해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아들에게 행여나 조그마한 문제나 잘못이라도 생길까봐 걱정하시고, 때로는 이렇게 조바심이 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걱정하시지 않도록 미리 전화를 드려도, 어머니께는 제가 못미더웠나 봅니다. 사제지망생 가운데서 방금과 같은 일과 속에서 사제성소를 포기하고 다른 길을 가기로 마음먹는 동기도 간혹 생기긴 하는데, 제 입장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저를 믿어주지 못한다는 게 못내 서운하기도 했습니다. 그럴때면 어머니께서 이런 말씀도 하십니다. : “네가 집에 와서도 늘 잠만 자고 네 할 일 성실하게 하고, 기도하고 그러면 내가 믿지.”
사실 기도는 하루종일 머무는 성당에서도 다 하는데도 당신 눈에 안 보이니 못미더운 모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토마사도의 불신앙과 신앙고백을 동시에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사도에게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서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토마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어려웠을 지도 모릅니다.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겠지요. 첫째는 부활하신 예수님 존재 자체에 대한 믿음이 부족합니다. 둘째, 주님을 뵈었다고 증언하는 동료제자들, 곧 예수님으로 인해 형성된 공동체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다가도 안믿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경우, 누구나 다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특정한 말씀이나 행동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나 행적을 통해 예수님 자체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 내가 생각하고 계산하고 판단할 수 있는 모든 것보다 예수님에게서 주어진 것을 내 기준으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또한 부활하신 주님을 내가 직접 목격하고 체험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흔적이 묻어있는 또다른 사람들 - 물론 나 자신도 포함됩니다 - 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내 아이처럼 돌봐주리라는 믿음이 없이 아이들을 맡길 수 있습니까? 어떤 일이나 프로그램이 아닌, 사람들에 대한 신뢰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자모회 엄마들이 간식을 준비할 때에 자기 자녀들을 먹이는 마음으로 준비한다는 믿음이 없이 그 간식을 내 아이가 먹도록 그냥 둘 수 있습니까? 간식의 내용도 물론 중요하지만, 아이들을 위해 준비하고 봉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믿음이 더 우선입니다. 신부나 본당의 봉사자들이 여러분의 정성을 모은 헌금이나 교무금을 함부로 쓰지 않는다는 믿음이 없다면 정성스럽고 기꺼운 맘으로 헌금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하느님과 이웃’이라는 상대방에 대한 신뢰는 그 만남의 방식보다 더 우선시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체험도 부활하신 예수님께, 그리고 예수님을 죽음에서 부활시키신 하느님, 마찬가지로 우리도 부활시키실 하느님께 대한 신뢰에서 시작됩니다.
어쩌면 예수님을 볼 수 있었던 제자들보다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하는 우리들이 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를 신뢰함으로써 우리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키워나갈 수 있다면 말입니다. 부활하여 살아계신 예수님은 그분을 믿는 이들과 더불어 계십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예수님은 그냥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분이지만, 믿는 이들에게 있어 그분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살아계십니다.
번호 | 제목 | 날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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