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들르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사랑받던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걷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이들의 집에 오신 것입니다. 조금은 착잡한 심경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맞이하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자세는 아주 조그만 차이가 있습니다.
마르타는 자신이 대접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예수님의 시중을 듭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예수님께 내가 해드릴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예수님의 곁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심경을 헤아리는 데에 집중합니다.
사랑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 상이한 방식을 보이는 둘의 모습은 모두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마르타의 시중은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행하는 것이며, 상대방을 배려한다기보다는 자신의 역할과 책임과 의무에 충실하기 위한 봉사에 그치기 쉽습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상대방에게 맞추어가면서 봉사하는 모습의 전형으로 드러납니다.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고자 할 때에, 그것이 상대방의 상황에 대한 이해 없이 자신의 방식대로 전해지는 것이라면 오히려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애를 쓰고 친절을 베풀었음에도 그것이 별 소용이 없는 헛수고였음을 알게 되면 실망하고, 안타까워하며 제 분에 못이겨 화를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되게 친절을 베푼다는 것은 상대방의 사정과 심경과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을 찾아서 그에 맞게 봉사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상대가 원하지 않는 때에 베푸는 친절은 오히려 상대방에게 고통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대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열정과 성의가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주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내 뜻대로, 내 방식대로, 내가 하고자 하는대로 이루어지는 고집으로 끝나버리는가를 생각해볼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내가 생각하는 모습에 끼워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참모습을 알아보고 깨닫기 위해 그분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하느님의 현존을 가까이서 느끼기 위해 자신의 오감을 그분을 향해서 열어둘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행여 우리가 자신이 해야 할 것에만 몰두하며 믿는다고, 혹은 하느님을 위해 봉사한다고 할때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