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이른바 공생활(公生活)을 시작한 이후, 말씀과 기적을 통해 당신이 구세주 그리스도 곧 구약시대부터 약속되었던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가르침에서 우러나오는 권위에 놀라고, 또 기적을 행하시는 그분의 능력을 보고 열광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들이 보고싶은 대로, 또 자기들이 아는 범위 내에서 그것들을 해석합니다. 그러다보니 예수님께서 전하고 싶어하는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 예수님은 자신을 메시아로 알렸지만 어떤 이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언자 가운데 누군가로 이해하고 묘사하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선생님은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우리에게는 퍽이나 당연한 이 사실을 고백함이 대단한 것은 예수님께서 알려주시고자 한 바를 정확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들처럼 베드로라고 해서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알아들을 만한 어떤 이유가 없겠습니까? 그럼에도 있는 그대로 드러난 상황,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것들을 전해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객관적이고 냉정하고 솔직한’ 베드로의 태도가 예수님께 대한 올바른 신앙을 고백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엿보게 합니다.
‘믿음을 가진다’는 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증명만으로 신앙의 신비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만, 신앙을 과학적, 논리적으로만 설명하려 들면 많은 경우 오류에 빠집니다. 신앙을 비과학적, 비논리적이라고 치부하는 이들이 가지는 실수 가운데 하나는 그 신비로운 사실을 이해해야 하는 자신들의 지식과 경험과 그런 근거들을 바탕으로 한 통찰력 자체가 완전히 과학적, 논리적이지 못한 부분을 간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믿음에는 분명한 근거가 있어야 하고, 그 근거를 ‘자기가 보고싶어하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닌, 드러난 사실에 대한 냉정하고 객관적인 판단으로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올바른 답을 말했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당신의 수난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여전히 받아들이거나 이해하기 쉽지 않은 당신의 정체성, 하느님의 섭리가 있음도 함께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도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자세의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선호하는 활동, 잘 할 수 있는 의무에는 적극적이고 충실하지만, 의미를 잘 모르겠거나 익숙치 않은 것, 내가 잘 하지 못하거나 자신감없는 어떤 계명과 활동에는 소극적이고 무심한 경우들이 있지요. 모든 것을 다 완벽히 잘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이미 자신만의 잣대를 만들어놓고 자신에게 이용가치가 있는 것만 받아들이는 데서 ‘신앙을 온전히 이해하려는 자세가 부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가르쳐주신 당신의 정체를 그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감염사태로 인한 상황 안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미사도 못 드리고, 사람들도 못 만나고, 생업도 곤란을 겪는 등 여러 가지로 여의치 않은 상황입니다. 저는 미사와 성사집전을 할 수 없고, 이점에 있어 신부의 역할이 없다는 이유로 이곳을 떠나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을 계속 합니다. 딱히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없다 하더라도 주위에 있는 누군가의 안부를 묻고 걱정하는 것, 이 황망함 속에서 걱정과 불안함을 같이 공유하며 견디는 것,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 이 불안함과 갑갑함 속에서도 신앙인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살아가는 데에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다면 그 기회를 기다리는 것 등 할 일을 찾아보아야겠지요.
적어도 이는 공동체의 사목자로서 스스로의 할 일을 찾아서 한다는 것이 아니라, 못마땅하고 싫어하고 피하고 싶을 수 있는 이 상황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봅니다. 그래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좀 더 정확히 찾을 수 있으니까요.
공동체의 교우들과 어울려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신앙을 돌보는 것이 제 소임이라면, 기도밖에 해 줄 것이 없더라도, 고작 가끔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 정도가 할 일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하면서 이곳 사제관에서 “얌전히” 카메라 없는 삼시세끼 촬영(?)을 계속할 것입니다. 별 것 아닌 이 작은 노력이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현재의 상황 속에서 내가 불평과 답답함에 갇혀 있지 않고 스스로가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모습이요, 복음에서 예수님을 실제 정체 그대로 받아들였던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닮은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여러분을 위해 저도 기도하고 있으며 계속 그러할 것이니, 여러분도 더욱 힘내어 “오늘도 신앙인답게”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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