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시죠? 그런데 사실 우리들 대부분은 하느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하여 대략은 이해할 수 있지만, 손에 잡히지도 않고 눈에도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해서 설명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느님은 누구누구다’라고 한마디로 정의내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신비입니다. ‘신비’라고 하는 것은 희미하게나마 알 수는 있지만 그것을 완전하게 알아차리는 것이 힘든 신적인 어떤 것을 말합니다.
교리교육의 방법 가운데 ‘신비교육’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의 머리로 완전히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먼저 그 신비를 체험하는 일련의 과정을 겪도록 한 후에 그 신비에 관한 내용을 설명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전지식과 개인적인 느낌, 체험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아, 이게 그런 것이구나’ 하고 어렴풋하게나마 받아들이고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비자 교리반에 나오시는 분들에게 주일미사참례를 꼭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의도에서입니다.
이처럼 신비로운 하느님의 일은 사람의 지혜로는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만일 누군가가 ‘내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면 그때가서 그 뜻을 따르겠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은 죽을 때까지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하느님에 대해 완전하게 알고, 그분의 사랑과 구원의 뜻을 이해했기 때문에 하느님을 믿고 귀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그분을 믿고 따라나섰기 때문에 그 사랑과 구원을 조금씩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게 합니다.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합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자기에게 생길 것이라고 말하니 말입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즈카르야는 벙어리가 됩니다. 믿지 못했던 즈카르야는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헤아린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말입니다. 정말 천사의 말대로 늙은 아내 엘리사벳이 아이를 가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되고, 비로소 천사의 지시대로 아기 이름을 요한이라고 짓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행위로써 다시 말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특성인 ‘신비로움’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지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 얻은 것입니다. 우리가 지혜롭고 똑똑해서 하느님을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고 지혜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려봅니다 : “보지 않고서도 믿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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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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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구도 감히 검증할 수 없는 하느님이십니다.
그 앞에 겸손하고,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 신비에 겨자씨 만큼의 열린 마음, 믿음이 예비신자분들께 깃들기를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