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9일은 성녀 가타리나 기념일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가타리나 성녀의 이름을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널리 존경받는 성녀이고, 그만한 성덕(聖德)을 지니신 분입니다.
가타리나 성녀(생몰연도 1347-1380)는 이탈리아의 주보성인이고, ‘교회 학자’로 공경을 받습니다. 성녀께서 교회사 안에서 이룬 많은 업적과 그로 인해 드러난 하느님의 은총은 많지만, 특별히 성녀께서 크게 공헌하신 바는 ‘교황을 중심으로 교회의 일치를 이루는 데에 앞장섰다는 사실’입니다.
1309년부터 1377년까지는 ‘아비뇽(avignon) 유수(幽囚)’라고 불리는 사건이 일어난 때입니다. 이는 프랑스 국왕의 힘이 강력해지면서 중세시대에는 모든 왕의 임명권을 행사하던 교황을 프랑스의 지배 아래에 두고자 강제로 교황을 프랑스 남동부 지방 아비뇽에 데려다놓은 것입니다. 문제는 교황은 ‘베드로의 후계자’이며 ‘로마의 주교’입니다. 그래서 교황권의 행사와 정통성을 놓고 교회 안에서 이견이 생겨났고,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는 교황들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아비뇽 유수’ 시기에는 아비뇽의 교황과 로마의 교황이 따로 존재했고, 사건 말기에는 서로 대립하는 두 교황의 정통성을 모두 부정하는 세 번째 교황까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두 명 혹은 세 명의 교황이 존재했다는 뜻이며, 그만큼 교회가 분열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비뇽의 교황이 로마로 돌아오면 가장 원만하게 해결될 수 있었을 테지만, 프랑스 국왕의 힘이 무서웠고 차츰 아비뇽에서의 편안한 생활에 안주하게 되면서 교황직에 태무심한 교황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비뇽 유수를 종식시킨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을 로마로 돌아오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가타리나 성녀였습니다. 그녀는 평소 교황권이 예수님께서 직접 제정해주신 권한임을 강조하며 교황권의 수호자다운 저술과 발언을 해왔습니다. 그리고는 아비뇽으로 교황을 찾아가 로마로 돌아갈 것을 설득하여 실행하게 만듭니다. 신분상으로 남녀간의 불평등이 존재하던 시대에 젊은 수도자가 쉽게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도 그분의 명성과 교회안팎의 존경이 뒤따랐기 때문일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거나 교회의 머리인 교황권을 지키는 것은 ‘교회의 일치를 도모함으로써 교회가 힘써야 할 본분에 충실한 존재가 되도록’ 하는 방법임을 성녀께서는 잘 아셨던 듯 합니다.
오늘 요한 복음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6,39)고 하십니다. 분열은 그 자체로 누군가를 포기하거나 잃을 수 밖에 없는 구조를 만듭니다. 그리고 이를 당연시하게 만듭니다. 정파적 견해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내뱉는 말 속에서나,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향한 힐난 속에서 ‘나와 그 사람이 다른 대접, 심지어 차별을 받아야’ 한다고 거리낌없이 말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악한 일을 두고 분노하거나 아픔을 토로하는 것을 어찌 잘못이라고 하겠습니까마는, 그런 까닭으로 쉽게 분열을 조장하는 말을 서슴지 않는 모습에는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하고, 자신이 그 분열과 갈등의 조장에 한몫했음을 부인하는 태도에 또다시 가슴답답함을 느낍니다. 분열은 또다른 분열을 낳고, 차별은 또다른 차별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 그러했음을, 교황님이라는 분들도 그런 분열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헤어나오지 못함을 역사적으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더욱더 다변화된 오늘날 사회에서, ‘진리, 원칙, 약속, 사랑' 등과 같이 일치를 이루기 위해 지켜져야 할 중심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 하다 못해 더 큰 분열을 막아보려 노력하는 모습을 통해 ‘일치하며 사는 삶’의 소중함을 아는 자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우리 신앙인이 이 세상 안에서 드러내어야 할 ‘하늘나라의 표징’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일치’가 획일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르더라도 갈라서거나 대립하지 않고 더불어 살아가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해야 할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를 통해 계속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가타리나 성녀가 지니셨던 성덕(聖德)을 우리 가운데 내려주시도록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며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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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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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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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 읽는 내내 요한복음4,34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이 구절과 영광송이 떠오릅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