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였던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합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역설적이게도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여 그분을 팔아넘긴 것은 ‘예수님께서 이루실 구원, 하느님 나라, 복음, 진리는 세상의 기준과 분명 다른 차원의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다 자신은 예수님처럼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생각, 자신이 바라는 메시아의 시대는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모습과는 다르다는 생각 때문에 많이 고민했을 것입니다. 유다가 본래부터 배신자의 피를 타고났다거나 예수님을 처음 따를 때부터 흑심을 품었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생각과 그분이 하시는 일의 의미를 몰랐다면 유다의 행동이 달라졌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유다가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에 대해서 알았던 것과는 별개로 몰랐던 것도 있는 듯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기준, 사랑과 희생으로써 세상을 구원한다는 하느님의 섭리가 얼마나 위대한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고하시고 십자가에서까지 몸소 실천하시는 참된 사랑은 다른 이들을 살리는 것 뿐 아니라 당신 자신까지도 살립니다. 그저 목숨만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하느님이시며 구세주로서 살아있게 합니다. 유다의 눈으로 볼 때, 한편으로는 나약해 보이고 때로는 위태로워 보이며 어쩌면 허무하게 끝나버릴 것 같은 예수님의 선택을 따르는 것이 진정한 행복과 영광을 가져다 준다는 것은 알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의 배신을 예고하시는 가운데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요한 13,36)고 말씀하십니다. 다 알지 못하는 것들도 모두 알아듣게 되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제자들이 두려워하면서도 흩어지지 않고 여전히 예루살렘, 곧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현장 가까이에 남아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유다와 같은 모습, 그와 같은 생각에 빠질 순간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지만 다 알아듣지 못하는 때가 있는가 하면, 그분의 뜻을 알아들어서 더 괴롭기에 차라리 포기하고 싶은 때도 있습니다. 극단적인 배신까지는 아니더라도 적당히 타협하거나 도망치기도 합니다. 이럴 때에 생각해 봅니다 : 우리도 유다처럼 예수님의 가르침,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알지 못해서 이런 나약하거나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닐까?
예수님의 파스카의 신비를 묵상하며 보내는 성주간(聖週間)이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헤아리고 깨닫는 은총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을 좀 더 닮아갈 수 있는 시간이기를 기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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