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어느 본당에서 예비신자교리반에 나오시는 한 자매님이 두 딸을 데리고 성당에 오곤 했습니다. 둘째딸이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성당에 와서 제일 좋은 것이 영성체를 못하는 사람에게 신부가 손을 얹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 같습니다.
2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 이 아이가 첫영성체를 준비할 때가 되었는데, 영성체를 하면 머리에 손을 얹어주지 않으니까 영성체를 안하려고 할까봐 걱정이 되어 엄마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엄마와 언니가 영성체하는 것이 부러워서, 꼭 영성체를 할 것이라고 했답니다.
이 아이가 더 좋은 것을 알게 되고 나니, 머리에 손을 얹는 것은 이제 식상해보였나 보다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에 나오는 갈릴래아의 이방인 지역에서는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 놀라워하며 기뻐했는데, 정작 고향인 나자렛에서는 “놀라워하면서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입니다.
맛있는 것을 많이 먹으면 그것이 좋은 줄 모르게 되고, 귀한 것이 흔해지면 그 귀중함을 잊게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 누군가의 훌륭한 모습, 헌신적인 수고, 따뜻한 사랑, 거룩한 표양 등을 좀 더 많이 보고 살아왔다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르는데, 이런 것이 좋은 것임을 인정한다면서도 사실 그다지 놀라워하거나 추켜세워주고 감사하기보다는 흔해 빠진 무엇을 본 것마냥 시큰둥하게 여기는 경우가 적지 않은 듯 합니다.
제 경우를 놓고 보더라도,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좋은 일을 체험하기도 하고 사목생활이나 가운데 은총의 체험을 하고서도, 더 나아지지 않았다거나 더 잘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에 젖어 하느님께 감사드릴 일도 줄어드는 것을 때로 느낍니다. 때로는 여전히 안고 살아가는 걱정거리가 해소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하느님의 은총도 우리에게 식상하게 여겨지고, 그 은총에 대한 감사함에도 형식적이거나 시큰둥함이 배어있기도 합니다.
결과의 만족도나 성취도 여부를 떠나서, 누군가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오늘도 묵묵히 감사인사를 받을 만한 일을 하며 살아가는 이들, 바로 그들의 삶 안에서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식상하게 여기는 느낌과 시큰둥한 반응이 어쩌면 우리가 실천해야 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계명’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지를 새삼 되돌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