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천사들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모두 모은다고 하지요. 선택된 이들은 ‘참 좋겠다’ 하고 잠시 묵상해 봅니다. 그곳에 있기 위해 우리는 ‘깨어 기다리는 종’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날’은 멀어 보입니다. ‘깨어 기다리는 종’이 아니라 ‘주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듯해서 말입니다. 주인이 되기 위해 돈을 법니다. 그러면서 건강을 잃지요. 그리고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 또 돈을 잃어버립니다. 절대 죽지 않을 것처럼 살고 있지만, 살아 본 적 없는 듯 무의미하게 죽어가는 우리의 현실을 바라봅니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르지만, 분명 ‘그날’이 온다는 것을 지금부터 생각하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다가오는 ‘그날’은 여름이 다가올 때 싹을 내는 무화과나무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잎사귀들을 내는 것은 ‘그날’이 가까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하늘과 땅은 다 사라져도 말씀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영원
한 것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 위로와 희망, 그리고 용기를 얻게 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참으로 박하게 살아갑니다. 더 얻으려고만 했지 주려고는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박해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런 얘기가 있더라고요. “금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가득 찬 은을 버려야 하고, 다이아몬드를 얻기 위해서는 또 어렵게 얻은 그 금마저 버려야 얻는다. 그러나 얻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버리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쉽지 않다. 왜냐하면 버리고 나서 오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까 봐.” 그래서 우리는 자꾸 더 박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채우기보다 비우면 행복에 더 가까워질 겁니다. 왜냐하면 ‘그날’이 언제인지 모르지만 ‘그날’에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사람들을 보며 우리를 대신하여 고통당하신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이고 ‘깨어 기다리는 종’이 그랬듯이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 그렇게 일하는 종에게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입니다. 분명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르지만, 그날에 우리는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입니다.
성모당 담당, 교구 사료실장 이연춘(마르첼리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