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 바르티매오라고 하는 눈먼 거지가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께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 10,51).”라고 한 것을 볼 때, 태생 소경이 아니라 후천적 장애로 보입니다. 날 때부터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면 적응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천적인 경우는 그전까지 익혀왔던 감각을 잃어버리면서 신체의 상실감은 물론, 심리적 상실감까지 가지게 됩니다. 이전의 자유로움을 알기에 예전의 온전함을 바라는 마음은 엄청나게 컸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차별과 자신의 한계에 부딪힌 나머지 길거리에 앉아 구걸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소리를 들었을 때, 그분이 아니시면 구원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러한 간절함은 그의 몸과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었습니다. 그 어떤 것들이 막아서도 오로지 예수님 한 분께만 집중했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저 분이 아니면 안 된다는 그의 간절함이 결국 예수님께 닿았습니다. 수많은 병자들과 거지들이 있었을 그곳에서 오로지 바르티매오만이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하느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나 응답을 받는 이는 적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바로 간절함에 있다고 봅니다. 후천적 소경에 거지, 더 이상의 떨어질 바닥이 없는 바르티매오에게 있어서 구원은 오직 예수님뿐이었습니다. 포기하는 사람, 욕심 가득한 기도를 바치는 사람, 의심 속에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간절함이 나오지 않습니다. 많은 이들이 기도를 하였지만, 예수님께서 들어주시던 기도는 간절한 이들의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딸을 살리려던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 하혈 병을 앓던 여인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한계를 알고 온전히 맡기는 마음으로 매달리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한 간절함 가운데 진심어린 기도가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런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많은 이들이 기도를 바치면서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런 원망에 앞서서 우리의 기도가 바르티매오처럼 정말로 간절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나의 기도가 간절했다면, 그 안에 나의 모든 것을 바친 믿음이 들어가 있을 것입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52).”라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의 구원은 하느님을 향한 간절함과 믿음에서 시작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향해 간절한 믿음으로 매달리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십니다. 하느님의 청력을 의심하기 전에, 그분의 무관심을 의심하기 전에, 과연 우리의 기도에 진정한 믿음과 간절함이 담겨 있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칠곡가톨릭병원 행정부장 김병흥(세영알렉시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