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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가톨릭신문사에서 소임을 맡던 중 쓰게 된 글 때문에 타교구 신자로부터 다소 불편한 말마디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찝찝한 기분은 어쩔 수가 없더군요. 어느 작가의 말처럼 만나고 접하는 사람의 수가 적고 자신의 말과 글이 가 닿는 범위가 측근을 넘지 않는다면 덕담이 주로 들린다고 합니다. 하지만 단위 수가 측근 범위를 넘어서게 되면 들려오는 말의 톤이 슬며시 달라진다고 합니다. 비공식적인 통계이지만 호()보단 오()가 더욱 적극적이고 참여적이라고 하네요.

문득 오늘 복음을 읽어가며 예수님에 대한 당시 세간의 평가에 주목해 봅니다. 정작 예수님의 중요한 메시지(message)보단 당신 즉, 메신저(messenger)가 더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모양새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그 평가에 관심을 보이십니다. 최근 이어지는 복음을 예수님에 대한 세간의 관심과 이에 대한 당신의 대응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더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실제로 당신이 널리 알려질수록 호응만큼이나 무시, 오해, 왜곡 등과 같은 세평이 따릅니다. 이에 대해 때론 적극적으로 반론을 펼치시고 때론 안타까움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쯤 되니 종종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말씀은 마치 당시 상황에 대한 적절한 대응처럼 느껴집니다.

이어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메시지 자체가 되는 장면을 밝힙니다. 바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한 예고입니다.

특히 이어지는 베드로의 반박에서 예수님의 답답함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어쩌면스승님은 그리스도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그의 반박이라는 맥락에서 마치스승님은 그리스도여야만 한다.”라는 식으로 들립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는사람의 일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보여준 일련의 행보는 예수님에 대한 연민, 미래에 대한 두려움만큼이나 자신의 사회적 입지 또한 염두에 두는 듯합니다. 예수님은사탄이라며 단호하게 대응합니다.

사람들과의 교류와 소통이라는 관점에서 과거 사형 도구이자 조롱거리였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세속의 이목 안에서 결단을 요구합니다. 박해시대 때 이 대목은 신앙고백에 앞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는 구절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일까요?

신앙을 드러내기에 세간의 평가가 무척 신경 쓰이는 시대입니다. 낙태 반대를 표현하기에 여론이 의식되고, 정의를 언급하기엔 이념논쟁이 버겁고, 사랑과 용서를 이야기하는 것은 진부하고, 생태환경 운동이 비효율적이라 여겨지지는 않는지요.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르 8,33)

 

 

 

 

2대리구청 사무차장·청년청소년담당 이대로(레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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