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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가톨릭 신학자 과르디니는 죽음이 가까웠음을 느끼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최후 심판 때 나는 질문을 받기만 하지 않고, 주님께 묻기도 하겠다. … 어떤 책이나 글, 교회의 교리나 교도권도 답할 수 없는 문제, 하느님은 왜 죄와 무죄한 이들의 고통이라는 구원에 이르는 끔찍한 우회로를 마련하셨는지답변을 듣고 싶다.” 덧붙여 이 모든 세상의 고통과 죄악이 일어날 때 하느님은 어디 계셨으며, 그런 일이 끊이지 않는 지금도 도대체 어디에 계시는지, 아직도 많은 사람은 질문을 던집니다.

여기에 성 요한 23세 교황님의 말씀으로 대답해 봅니다. “(교회는) 모든 시대의 오류를 견뎌 냈습니다. 그러기 위해 교회는 종종 오류를 단죄하였고 때로는 매우 엄하게 대처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엄격함이라는 무기를 들기 보다자비라는 치료제를 사용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하느님의 얼굴은 자비입니다. 벌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용서와 기다림, 사랑이 가득하신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하느님을 모릅니다. 욥이 부르짖는 것처럼 부르짖을 뿐입니다. 세상의 무질서만 바라보고, 그 무질서 안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하느님을 바라보지 못할 뿐입니다. 하느님 자비의 얼굴을 잊어버렸습니다.

가라지의 비유는 이를 잘 말해 줍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13,30)

 

‘무질서 속의 질서를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시선으로는 무질서입니다. 가라지를 뽑아 버려야 질서 정연하고, 더 잘 자라는 밀을 통해 세상의 더 큰 선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질서 속에는 하느님 자비의 얼굴은 없습니다. 정의의 하느님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질서만을 찾으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실 때, 결국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42,5)

우리는 지금 어떤 하느님의 얼굴과 마주하고 있습니까?

 

세상의 무질서 속의 질서를 마련하시는 하느님 자비의 얼굴을 우리가 언제나 가서 뵈올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마태 5,45)

 

 

 

성안드레아성당 주임 | 권대진 다마소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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