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우리는 일의 크기를 현세적으로 계산하기 일쑤입니다. 더 큰 건물, 더 많은 작업량, 더 많은 사람 수, … 이런 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는 자신도 힘들고 타인도 힘들게 합니다. 인간의 탐욕은 무한정 늘어날 수 있어서 우리는 지구를 다 집어삼키더라도 부족한 욕구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것을 가져다 주더라도 만족하지 못하는 내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명한 증거가 더할 나위 없이 소비를 가중시켜 온 오늘날 생태계의 어마어마한 파괴와 그 결과물이 다시 우리에게 화살이 되어 돌아오고 있는 분명한 현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을 통해서 당신이 하신 일을 하고 그보다 더 큰 일도 하신다고 합니다. 그럼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셨으니 우리는 물 위를 날기라도 해야 할 것 같고, 예수님은 오천 명을 먹이셨으니 우리는 오만 명을 먹여야 할 것 같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크기를 잘못 해석한 탓에 나오는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영혼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크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예수님은 부자들이 남는 것에서 내는 예물보다 가난한 과부의 렙톤 두 닢이 더 많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과부는 자신의 온 정성을 봉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혼의 크기는 겉으로 가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마어마한 부를 소유한 이가 오히려 초라한 내면을 지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분이고, 외적인 힘을 내세우는 이의 내면에 더할 나위 없이 나약한 영혼이 숨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분입니다. 정반대로 예수님은 겉으로는 내세울 것이 없어 보이는 존재라도 그 내면에 깊고 넓은 영성을 지니고 있는 것을 알아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안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의 헛된 요구에 맞추어 절대로 만족시킬 수 없는 그들의 이상에 허덕일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를 하느님의 손길에 맡겨 드리면 됩니다. 그러면 무한한 크기와 넓이를 가지신 분이 우리를 원하시는 대로 맞추어 쓰시게 됩니다. 그것이 진정 큰 일을 하는 방법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께 우리를 내어 드리는 길입니다.
가장 크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가장 초라해 보이는 방식으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수난당하게 하시고 죽게 하셨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아버지께서 나를 통해 일하시도록 한다면, 하느님은 우리를 통해서 얼마든지 큰 일, 더 큰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초전성당 주임 | 마진우 요셉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