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는 교회와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성녀 파우스티나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을 통해 새롭게 전달된 ‘자비’라는 주제에 각별히 주목하고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자비’라는 말은 불교를 비롯하여 다른 종교와 문화에서도 많이 쓰이는 것이어서 자칫 모두가 비슷한 의미로 이해될 가능성이 크지요.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자비’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주 고유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에서 ‘자비’라는 말은 인간의 자비, 인간의 선행을 가리키기 전에 성경 첫 번째 책에서부터 끝까지 ‘하느님의’ 자비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자비’는 죄와 고통,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허덕이고 있는 인간을 만나고, 치유하고,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존재’와 ‘현존’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오늘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봉독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는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중심으로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존재가 절정으로 남김없이 드러나는 말씀입니다. 이 중 날마다 거행되는 미사 성찬 제정과 축성문을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과거에는 굵은 글씨 ‘많은 이를 위하여’가 ‘모든 이를 위하여’로 되어 있었습니다. 단지 글자만 조금 바뀐 것일까요? 라틴어 ‘pro multis’를 직역한 것이 전부일까요? 여기에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존재 앞에, 우리 모두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예수님의 자비로운 현존 앞에 서 있는 인간, 그의 조건을 상기시키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작년 마지막 날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신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의 해설을 풀어서 설명하는 것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자유와 책임과 상관없이 구원받았다는 논리는 그리스도교의 구원론이 아닙니다. 이는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의 품위,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시키는 주술적인 사고입니다. 성체성사에서 예수님 구원의 실현은 그 행위 자체로 모든 이에게 자동적으로 추상적으로 실현되는 주술이 아닙니다. ‘많은 이를 위하여’라는 표현은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시는 예수님 앞에 우리 각자의 자유로운 응답, 책임과 협력의 여정이 언제까지나 남아있음을 뜻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성주간 그리고 성삼일 동안 베풀어질 하느님 자비의 존재와 현존은 모든 이에게 거저 주어지는 선물이지만 그것만으로 완료되는 선물이 아닙니다. 하느님 자비의 무게, 즉 고귀함은 그것이 결코 일방적이지 않고 우리 편의 계속되는 여정을 기다리고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미사 때 ‘많은 이를 위하여’라는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그분과 함께 걸어가야 할 여러분 각자의 여정이 남아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기도의 여정, 이를 중심으로 열매 맺어야 할 사랑의 실천과 섬김의 여정, 결국 하느님을 닮아갈 우리 존재의 성화 여정은 멈추지 않고 충실히 계속되어야 합니다.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 정창주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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