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수난 전날 저녁,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나서, 유다의 가슴 아픈 배반을 알린 후,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과연 이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묵상해 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고 말씀하시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아버지께 기도하고 간구했을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가 버린 배신, 하지만 그 가운데 인간에 대한 연민과 용서! 이 모든 것이 교차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과정을 지나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사랑하여라.”라는 이제 홀로 남겨질 제자들에게 하신 유언과 같은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2천 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겐 그렇게 절박하게 다가오지 않을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사랑하기에, 용서하기에, 또 포용하기에 너무 많은 실패의 경험과 상처들 때문일까요? 그러기에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그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기’를 말하기가 쉽지 않음이 사실입니다. 오히려 적당한 타협과 심리학적인 탈출구가 우리에게 더 익숙한 듯합니다. 그래서 저도 조심스럽게 신자들에게 말하곤 했습니다.
‘사랑하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도록 노력합시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제자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있는 것도 이제 잠시뿐이다.”(요한 13,33)라고 말씀하시며 이제 홀로 남게 될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든 기적과 가르침을 요약하여 ‘이것만은 꼭 지켜라.’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은 명령입니다. ‘서로 사랑하면 좋겠네, 사랑하도록 노력합시다.’가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면, 이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본질이며 우리가 놓칠 수 없이 끝까지 손에 쥐고 몸부림쳐야 할 절체절명의 명령인 것입니다. 참 많이 듣고 참 많이 생각하고 참 많이 노력해 왔지만, ‘용서하기’가, ‘내어주기’가, ‘사랑하기’가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하지만 꼭 해야 되는 것, 목숨 내놓고 해야 되는 것이기에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 말이 좀 억척같습니다만, 우리는 ‘사랑하도록 노력합시다.’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신자 여러분, “사랑하여라.”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먼저 보여주신, 그분의 마지막 ‘명령’임을 잊지 맙시다.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 김성근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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